2017/7/10
책을 읽는 중에 크게 감탄한 순간은 없었다. 물 흐르듯이 읽었다. 내 집중력으로 소음 가득한 서점에서 다 읽었으니 크게 집중력을 요하는 소설집은 아니었다. 이 말은 문장이 유려하다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큰 특색이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번역서가 아닌 모국어로 된 글을 읽을 때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만 꼽아보자면 밤낮으로 말과 언어를 조탁하여 작품을 내놓는 직업 작가들의 문장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 즐거움은 친숙하다고 생각했던 어휘를 낯선 상황에서 생경하게 사용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으로,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어휘를 찾아내어 적확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소설집에서는 그런 즐거움을 느낀 순간이 (거의) 없었다. 문장의 밀도도 아쉬웠다. 밀도 있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좋은 소설이고, 여백이 많은 소설은 나쁜 소설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좀 아쉽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아쉬운지 얘기를 해야 될 텐데 그러면 글이 길어지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그만 적기로 한다.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뻔했다.
아빠와 다니던 식당들에 비하면 남자와 가게 되는 곳은 늘 수준 미달이었어요. 물론 그럴 수밖에요. 중산층 집안의 대학생 남자가 용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어떤 곳이겠어요? 들큰한 조미료맛 말고는 아무 맛도 없는 음식들. 가짜 모차렐라 치즈를 얹은 피자 같은 것을 먹는 거죠. 한번은 테마파크에 놀러갔는데 유치하기만 할 뿐, 아무 감흥이 없었어요. 너구리 복장을 한 알바생들이 재롱을 떠는 유럽풍 거리에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것은 열 살 이전에 해야 할 일 같았어요. 아빠 때문에 내가 너무 겉늙어버린 걸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재미가 없는 건 어쩔 수가 없었어요.(23p)
어쩌면 그 말은 저에게라기보다 엄마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 거예요. 그래요.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어떤 말을 남에게 하고 살지요.(38p)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39p)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 짓눌린 인간의 냄새를 용케도 잘 맡았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사람들은 밝고 명랑하고 활기찬 사람과 함께일 때 미구에 다가올 위험에도 더 잘 대비할 수 있을 것처럼 느꼈고, 계약서에도 더 흔쾌히 사인했다.(54p)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힘든 순간을 겪을 때마다 서진은 돌아가고 싶었다. 인생의 원점, 자신이 떠나온 곳, 사람들이 흔히 고향이라 말하는 어떤 장소로. 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아는 곳으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떠돌이의 인생을 살았다.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고, 커서도 한곳에 오해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사람에게도 비슷해 묵은 관계라고는 없었다. 오래전에 본 어떤 영화에서 인생이 망가진 주인공이 “나 돌아갈래!”라고 외칠 때, 서진은 그에게 동정심이 생기기는커녕 가벼운 질투가 일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은 그가 영원히 갖지 못할 값진 성취처럼 보였다. 그런 성취가 누군가에겐 기본으로 주어지고, 자신 같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니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은가.(87p)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큰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지금은 날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말야.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 알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게 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어.(92p)
제가 잘못했다고 말해야 되는 상황입니까?(93p)
“잠깐 그런데 그 여자, 뭐하는 사람이라고 했지?”
“너한테 얘기해준 적 없는 것 같은데.”
유도신문은 나의 장기이지만 단련된 사람에게는 잘 안 먹힌다.(125p)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느끼는 게 뭔지 알아?”
“무슨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것 같은 개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죽을 때 죽더라도 약은 팔지 말자.”
“살아오는 동안 내 영혼을 노렸던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는 거야.”(199p)
“사장님께 정말 부탁드리고 싶었던 게 그거예요. 제가 존경하는 사장님이 제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세요.”
“나는 불굔데?”(209p)
“근데 너무 찌질하지 않아? 바로잡긴 뭘 바로잡아. 어떤 과거는 그냥 흘려보내야 되는 거야.”
“사람들은 죽을 날이 다가오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뭐 그럴 줄 아나본데, 천만의 말씀. 새록새록 떠오르는 일들은 전부 이런 일들이야. 괜히 남한테 좋은 사람 노릇하기 시작한 기원이 언제인가 따져보니 바로 그때부터야. 병도 옮고 나쁜 남자까지 돼주었잖아?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딨어?”(216p)
그냥 감당해. 오욕이든 추문이든. 일단 그 덫에 걸리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인생이라는 법정에선 모두가 유죄야.(230p)
“태준씨네 냥이들이 속죄 같은 걸 하겠어? 한다 해도 어느 주인이 그런 걸 원하겠어. 우리를 가둔 신, 혹시 그런 존재가 있더라도 속죄 따위 원하지 않을거야.”
“왜요?”
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전적으로 물었다.
“우리를 사랑하고 예뻐한다면 죄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을 거야. 그게 아니라 그냥 고통받는 걸 보고 즐길 심산이라면 회개하고 반성해봐야 뭔 소용? 끝없이 시련이나 내리고 어떻게 하나 구경하겠지.”
“언니, 속죄는 우릴 가둔 놈들 보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늘에 계신 진짜 신, 나의 주님께 하는 거라고요.”
“나도 그 얘기거든. 자기가 창조한 인간에게 벌이나 내리는 신, 난 필요 없어.”
수진도 지지 않았다.
“인간은 결코 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신인 거죠. 인간의 지혜로 신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 자체가 죄란 말이에요.”
강재가 끼어들었다.
“정은씨는 좀 무임승차 아니에요? 그래도 수진씨는 뭐라도 하잖아요? 여길 나가기 위해서요.”
할말이 많았지만 정은은 입을 다물었다. 아, 수진은 속죄를 믿고, 강재는 자기 덩치를 믿고, 태준은 인과관계라도 믿는데, 나만 아무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무임승차자가 된 것이로구나. 나도 믿는 것이 있어, 지리산 도령 강재씨. 나는 우울을 믿어. 인간은 천둥이 치고 비가 퍼붓는 궂은 날씨에는 울적하도록 진화했어. 가만히 동굴에 틀어박혀서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는 게 유리하거든. 에너지를 아끼면서 말이야. 인류가 이렇게 진보한 건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과오에 집착해온, 사실 나 같은 우울증 환자들 덕분이야. 그들은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아. 스스로를 과신하지도 않고. 그래서 살아남은 거야. 알잖아.
(...)
인류의 역사는 신의 뜻을 알고 있다고 확신한 이들이 저지른 악행으로 가득차 있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그랬고, 중세의 십자군이 그랬고, 가깝게는 알카에다와 ISIS가 그랬다.(246-248p)
“정은씨, 난 언제나 현재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만 지나가자. 그럼 나아질 거야. 그런데 늘 더 나빠졌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더 행복했어요. 그럼 지금 이 순간도 최악이 아닐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그래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에서는 가장 젊고, 제일 괜찮은 순간일 수 있다는 건데······ 우리 모두 여기서 늙어가다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처음 들어왔던 때가 그래도 좋았어. 그땐 젊었고, 희망도 있었다.”
정은은 눈을 떴다.
“고등학교 때 담임이 만날, 우리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원했던 내일이다, 같은 헛소리를 칠판에 적어놓곤 했어요. 그 시절 노트에 보니까 내가 이렇게 적어놨더라구요. 그토록 원했던 내일도 막상 오면 헛되이 보낸 어제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너무 비관적인가요?”(257p)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아이를 되찾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지옥은 그 아이를 되찾는 순간부터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269p)
ㅡ 김영하, <오직 두 사람>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