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18
1. 민간에 퍼진 ‘장애우’라는 용어가 깊게 뿌리 박혀 10년이 지난 여태껏 쓰이고 있고, 한술 더 떠 장애인을 지칭하는 긍정적인 용어라는 인식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차에 내게 ‘장애우’라는 용어가 왜 잘못되었는지 알려주었던 책을 다시 읽었다. 1쇄 찍었을 때 사서 읽었으니 근 10년 만에 다시 읽었다. 감상은 ‘페미니즘의 도전’을 다시 읽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첨단 기술 개발을 논하며 기술의 혁신은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속도로 진행된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적어도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의 정신은 끄떡없는 것 같다. 급속도로 변하는 물질문화와 비물질문화 간의 격차를 일컫는 ‘문화지체’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사람의 정신과 사고과정이라는 게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나만 해도 10년 전의 나와 2017년의 내가 드라마틱하게 다를까하는 의문이 든다. 비슷하게 이 책이 쓰였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장애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뀐 것 같지 않으며, 여전히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자 무서워하고 기피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2. 누군가를 차별하고 괴롭히고 따돌릴 때, 악의에 기반을 두고 행해지는 것과 선의에 바탕을 두고 행해지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쁠까. 악의로 가득 찬 차별행위는 말할 나위도 없이 나쁘지만 왜 선의에 충만한 차별행위는 이야기하지 않나. 그로 인해 몰라서, 알려고 하지 않아서, 무식해서 행하는 차별행위가 더 번성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그런 문제에 대해 지금껏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으며, 그만큼 차별받지 않았던 주류의 삶을 살아왔음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
이러한 매체들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는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묶어 볼 수 있다.
첫째, 장애 때문에 어려움과 비참함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시혜와 동정을 불러일으켜 시청자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들.
둘째, 그러한 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는 이웃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삭막하지만 아직은 인간미가 살아 있는 살만한 곳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야기들.
셋째, 그러한 봉사에 의존하지 않고 개인의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장애인의 영웅담.(27p)
악의에 찬 편견과 왜곡뿐만이 아니라, 선의에 충만한 그릇된 인식 역시 이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8p)
어떤 개인이 장애에 대해 갖는 인식은 결코 그 자신의 선의와 악의에 의해, 명석함과 어리석음에 의해, 즉 그 자신의 임의적 선택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매우 많은 것을 스스로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회적인 기준과 가치에 따라 사회적으로 판단한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할 여지도 없는, 감성적이며 본능적인 판단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미의 기준까지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이러한 주장을 조금 더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30p)
사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이라고 규정한 범주 내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차이들을 지니고 있다. 또한 많은 경우에 장애인 내부의 차이는 비장애인과 장애인간의 차이보다도 크다. (...) 농인, 나, 시각장애인이라는 3명의 집단 내에서 두 명의 장애인간의 차이는 나와 다른 두 명의 장애인간의 차이보다 더 크다. 몸 자체의 차이도 그렇고, 구체적인 생활 장면 속에서 겪게 되는 차이도 그렇다. 이는 목발이용 장애인, 나, 전동휠체어이용 장애인이라는 3명의 집단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을 하나의 집단(장애인)으로 분류하는 것은, 바로 나(비장애인)의 몸이 표준이라는 전제 아래,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인간을 분류했기 때문이다. 즉, 장애인은 비장애인 중심주의 따른 임의적인 범주인 것이다.
그런데 한 장애인 단체가 단체 명칭과 단체에서 발간하는 잡지를 통해 ‘장애우’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 용어 역시 시민 사회단체들은 물론 방송계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장애를 지닌 사람에 대한 가장 올바른 표현은 무엇인가’라는 한 설문 조사에서, 장애우라는 응답이 50%를 넘었다고 하니 그 영향력도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이 용어가 정치적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정확히 지적되고 또 비판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장애우라는 표현, 즉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라는 의미 구조 안에서 당신은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가? 당신은 장애인이고 우리는 비장애인이다. 즉 장애우라는 표현은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장애인을 규정하고 있는 용어인 것이다. 친구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우(友)’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도 사람들 간의 관계를 나타내거나 2, 3인칭의 표현으로는 쓰일 수 있지만, 장애인이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나타내는 1인칭의 표현일 수는 없다. “나는 장애우입니다”라는 표현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는 나이주의와 권위주의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연령과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모든 장애인이 나와 친구일 수는 없다. 역설적으로 나이주의가 매우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장애우라는 표현이 무분별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은, 비장애인과의 관계에서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확한 정치적 비판의 지점이 수반되지 않은 막연한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것은, 장애라는 문제를 사회 구조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이를 해결해야한다는 문제의 핵심과 무관하거나 이를 비켜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우라는 표현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장애인 단체에서 Differently abled people(다르게 할 수 있는 사람)라는 영어식 완곡어법 역시 앞서 도입하여 단체의 영문 표기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결코 무관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Differently abled people이라는 표현은 보다 완곡하게 ‘같은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있으며, 일부 장애인 단체들도 영문 표기에서 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으로 과연 장애인을 제대로 지칭할 수 있는가? 인간 모두가 다들 저마다의 차이를 지니고 얼마간은 다른 방식으로 일을 수행하지 않는가? 따라서 이 역시 장애인을 배타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면, 암묵적으로 하나의 표준을 전제로 하는 표현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다르다’라고 했을 때, 이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준거를 필요로 하며, 이 때 기준은 비장애인의 몸과 행동, 그리고 비장애인의 방식과 속도일 수밖에 없다. 즉 이러한 표현은 장애라는 말 자체를 피하면서 무언가 긍정적인 방식으로 장애인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사회적 정상성이라는 문제제기를 회피하거나 이를 강화하고 있는 용어법인 것이다.(57p)
ㅡ 김도현,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中, 메이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