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20

 

 

K-조국에서 여성으로 살며 겪는 무수한 차별을 소설로 풀어냈다. 많이 읽히는 건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이지만 대다수가 여성 독자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의 한남에게 가볍게 권해 봄직한 책.

 

 

 

 

할머니는 자신의 허망하고 비참한 처지를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위안했다.

그래도 내가 아들을 넷이나 낳아서 이렇게 아들이 지어준 뜨신 밥 먹고, 아들이 봐 준 뜨끈한 아랫목에서 자는 거다. 아들이 못해도 넷은 있어야 되는 법이야.”

뜨신 밥을 짓고, 뜨끈한 아랫목에 요를 펴는 사람은 할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이자 김지영 씨의 어머니인 오미숙 씨였지만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살아온 역경에 비해 마음이 여유롭고 또래 시어머니들과는 달리 며느리를 아끼던 할머니는 진심으로 며느리를 생각해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들이 있어야 한다,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 아들이 둘은 있어야 한다······.(26-27p)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날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혼났다. 왜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 그렇게 배우고 컸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68p)

 

 

멀리 생각해.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게 있는 줄 알아?”

선생님만 한 게 어떤 건데?”

일찍 끝나지, 방학 있지, 휴직하기 쉽지.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그만한 직장 없다.”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좋은 직장 맞네. 그럼 누구한테나 좋은 직장이지 왜 여자한테 좋아? 애는 여자 혼자 낳아? 엄마, 아들한테도 그렇게 말할 거야? 막내도 교대 보낼 거야?”(71p)

 

 

스포츠에 문회한인 김지영 씨를 위해 남자 친구는 경기 시작 전에 주요 선수와 중요한 룰에 대해 간단히 알려 줬고 경기 도중에는 둘 다 경기에만 집중했다. 김지영 씨는 왜 경기를 보면서 바로바로 설명해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너도 영화 볼 때 나한테 대사 한마디 한마디, 장면 하나하나 다 설명하지 않잖아. 경기 중에 계속 여자한테 설명하는 남자들, 뭐랄까, 거들먹거리는 거 같달까. 경기 보러 온 건지 아는 척하러 온 건지 모르겠어. 하여튼 좀 별로야.”(86p)

 

 

,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 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해서 김지영 씨도 항상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더 유심히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선배의 목소리가 맞았다. 취했을 수도 있고,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괜한 짓을 할까 봐 더 과격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김지영 씨의 처참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93p)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해. 지금도 봐, 학생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줄 알아?”

어쩌라고? 부족하면 부족해서 안 되고, 잘나면 잘나서 안 되고, 그 가운데면 또 어중간해서 안 된다고 하려나?(97p)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100-101p)

 

 

새로운 남자 친구는 윤혜진 씨와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김지영 씨보다 나이는 한 살 많은데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아직 학생이었다. 김지영 씨의 상황과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었다. 잘될 거라는 막연한 낙관도, 그깟 취직 좀 늦어지면 어떠냐는 무책임한 위로도, 왜 이 정도 스펙밖에 갖지 못했냐는 흔한 질타도 하지 않았다. 준비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고,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술을 사 주었다.(104-105p)

 

 

회사에서는 임신한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출근과 퇴근 시간을 30분씩 늦출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김지영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 동기가 대뜸 말했다.

, 좋겠다. 이제 늦게 출근해도 되겠네.”

그럼 너도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겉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임신으로 인해 겪는 모든 불편과 고통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동기의 말이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남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사람이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지영 씨가 조용하자 오히려 같이 있던 또 다른 남자 동기가 나무라듯 말했다.

, 30분 늦게 오는 대신 30분 늦게 퇴근하잖아. 똑같이 일하는데 왜 그래?”

우리가 칼퇴하는 회사도 아닌데 뭐. 그냥 30분 날로 먹는 거지.”

(...)

주어진 권리와 혜택을 잘 챙기면 날로 먹는 사람이 되고, 날로 먹지 않으려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딜레마.(138-139p)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144p)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

의사는 모니터에 뜬 김지영 씨의 이전 치료 기록들을 훑어 본 후, 모유 수유를 해도 괜찮은 약들로 처방하겠다고 말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148-149p)

 

 

머리만 좀 지끈거려도 쉽게 진통제를 삼키는 사람들이, 점 하나 뺄 때도 꼭 마취 연고를 바르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엄마들에게는 기꺼이 다 아프고, 다 힘들고,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다 이겨내라고 한다. 그게 모성애인 것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혹시 모성애라는 종교가 있는 게 아닐까. 모성애를 믿으십쇼. 천국이 가까이 있습니다!(151p)

 

 

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다는 건, 그런 짓을 용서해 줄 이유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156p)

 

 

물론 딸, 여학생, 여자친구, 여직원, 아내, 며느리로의 삶이 녹록했던 적은 없다. 그러나 엄마라는 정체성은 단연 압도적이다. 하나의 생명을 키워야 한다는 어려움 때문이 아니다.

엄마가 되면서 개인적 관계들이 끊어지고 사회로부터 배제 돼 가정에 유폐된다. 게다가 아이를 위한 것들만 허락된다. 아이를 위해 시간감정에너지돈을 써야 하고, 아이를 매개로 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 엄마가 아닌 자신을 드러내면 엄마의 자격을 의심 받는다.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아이를,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은 여성의 의무가 아니라 사회의 의무인데, 개별 가정에서 대부분 엄마가 독박육아를 하고 있는 현실에 분노가 치민다. 출산 후 독박육아 몇 개월 만에 겨우 집을 나와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맘충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타인에 대한 돌봄이 사라진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타인을 돌보고 있는 존재인 엄마가 남편이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카페나 다니면서 자기 아이만 위하는 이기적인 벌레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이다. 여성혐오 시대에 모성애라는 종교조차 침탈되는 양상이다. 모성에 대한 신성시도, 맘충이라는 혐오도 여성을 옭아맬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를 온전히 지킬 수 있겠는가.(188-189p)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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