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14

 

 

소세키 소설을 읽어봤다면 좀 읽어본 입장에서도 전혀 지겹지 않고 근래 독서 중 가장 많이 웃었던 시간이었다. 내용이야 뭐 항상 그렇듯 게으름뱅이 룸펜과 그 주변 인물의 이야기가 기본 골자를 이루지만 초기작이라 그런지 유머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이야기의 구조는 크게 고양이 화자가 자신의 오만한 시각으로 인간을 품평하며 풍자와 해학을 보여주는 부분과 자신이 기거하는 곳의 주인과 그 주변 인간들의 대화를 꼼꼼히 서술하는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을 텐데, 비교적 전자가 덜 좋았고 후자가 더 좋았다. 특히 천하의 게으름뱅이들이지만 나름 나름의 매력이 있는 자들이 펼치는 대화가 압권이다. 이 대화는 둘보다는 셋, 셋보다는 넷 이런 식으로 인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재미가 배가 되는 한편, 그에 상응하여 대화의 원래 목적은 휘발되고 대화는 산으로 간다. 이 대화를 즐기지 못한다면 이 책을 읽는 재미의 대부분을 놓친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 온갖 신소리와 흰소리로 한담을 나누는 한가한 작태가 지겹게 느껴지고 진행이 늘어진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읽다가 포기하고 책을 덮겠지. 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그 무익하고도 한갓된 대화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라 할만하다. 대망의 마지막 장은 이 책에 등장했던 대부분의 인물이 한자리에 모이는 데 읽기 전부터 웃음이 비어져 나와 혼났다. 감히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이 말인즉슨 끝까지 읽으라는 말이다.

그 후’, ‘한눈팔기’, ‘마음같은 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중후 반기 작품도 좋아하지만 왜 이제 읽었나 싶을 정도로 데뷔작 나름의 매력을 느꼈고 더불어 그 이후 작품들과의 공통점과 변화된 점을 비교해볼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내 주인은 나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좀체 없다. 직업은 선생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루 종일 서재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식구들은 그가 뭐 대단한 면학가인 줄 알고 있다. 그 자신도 면학가인 척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식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가끔 발소리를 죽이고 그의 서재를 엿보곤 하는데, 대체로 그는 낮잠을 자고 있다. 가끔은 읽다 만 책에 침을 흘린다. 그는 위장이 약해서 피부가 담황색을 띠고 탄력도 없는 등 활기 없는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 주제에 밥은 또 엄청 먹는다. 배터지게 먹고 나서는 다카디아스타제라는 소화제를 먹는다. 그 다음에 책장을 펼친다. 두 세 페이지 읽으면 졸음이 몰려온다. 책에 침을 흘린다. 이것이 그가 매일 되풀이하는 일과다.(19p)

 

 

나는 얌전히 앉아 세 사람의 이야기를 차례로 들었는데, 우습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써 입을 놀리고,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웃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 말고는 별 재주가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108p)

 

 

요컨대 주인도 간게쓰 군도 메이테이 선생도 속세를 벗어나 태평한 시대를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세미외처럼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초연한 척하고 있지만, 실은 그들 역시 명예나 이익에 집착하는 속된 마음도 있고 욕심도 있다. 그들이 일상적으로 나누는 담소에서도 경쟁심이나 승부욕은 언뜻언뜻 내비치는데,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그들이 평소에 욕을 해대던 속물들과 한통속이 되고 말 터이니 고양이인 내가 봐도 딱하기 짝이 없다. 다만 그 언동이 어설픈 지식을 과시하는 사람들처럼 판에 박은 듯한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은 그나마 장점이라 할 만하다.(109p)

 

 

뒷발이 이렇게 늘어진 걸 보니 쥐를 잡기는 틀렸군····· 어떤가요? 제수씨, 이 고양이 쥐를 잡던가요?”

나만 가지고는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옆방의 안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쥐를 잡기는요? 떡국 먹고 춤이나 추지.”(121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선생은 아주 고상한 체하며 자기만 인간답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요. 바보 같은 자식입니다.”

유감스럽지만, 여잡니다. 자식이라니요, 한참 잘못 짚으셨습니다.”(149p)

 

 

아니, 너 언제 머리 올렸어?”

오늘이요.”

하녀는 휴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되도록 간단히 대답했다.

건방지게, 몸종인 주제에.”

네 번째 핀잔은 다른 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 새 깃을 달았네?”

네에. 요전에 아씨께서 주신 거예요. 너무 예뻐 아까워서 고리짝에 넣어두었는데, 쓰던 것이 너무 지저분해져서 바꿔 달았어요.”

내가 언제 그런 걸 줬지?”

지난 설에요. 시로키야에 가셨다가 샀는데····· 녹갈색에 스모 선수들의 순위표 무늬를 새겨 넣은 거예요. 너무 수수해 싫다면서 저한테 준다고 하셨던 바로 그거예요.”

어머, 그러니. 잘 어울리는구나. 얄미울 정도야.”

감사합니다.”

칭찬하는 게 아냐. 얄밉다는 거지.”

네에.”

그렇게 잘 어울리는 걸 왜 아무 말 없이 받은 거지?”

?”

너한테 그렇게 잘 어울린다면, 내가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 아냐.”

아마 잘 어울리실 거예요.”

어울릴 줄 알면서 왜 아무 말 않은 거야? 그러고서 시치미 뚝 떼고 그걸 달고 있다니, 정말 못돼 먹었네.”(172p)

아오 진짜 어쩌라곸ㅋㅋㅋㅋㅋㅋ

 

 

돌아와보니 깨끗한 집에서 갑자기 지저분한 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인지 양지 바른 산꼭대기에서 어둑어둑한 동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탐험을 할 때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방 안의 장식, 맹장지나 장지문의 상태에는 눈길조차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자 내가 거처하는 곳의 저속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이른바 진부함이 그리워졌다. 선생보다는 역시 사업가가 훌륭한 것 같았다. 나도 좀 이상하다 싶어 예의 꼬리를 통해 점을 쳐보았더니, 그 말이 맞다, 맞다, 하고 꼬리 끝으로 신탁을 내려주었다.(173p)

 

 

하하하. 선생은 참 태평해서 좋군. 나도 학교 선생이나 할 걸 그랬네.”

해보게, 아마 사흘이면 싫어질 테니.”(206p)

 

 

이 하녀는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이를 간다는 소리만 하면 언제나 그걸 부정하는 여자다. 자기는 태어나서 입때껏 이를 간 적이 없다며 꼭 고치겠다고도 미안하다고도 말하지 않고, 그저 그런 기억이 없다고 억지만 부렸다. 하긴 잠을 자면서 부리는 재주이니 기억에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기억에 없더라도 사실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니 난감한 것이다. 세상에는 못된 짓을 하고서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자부하는 일이니 순수해서 좋기는 하지만, 남이 난처해하는 사실은 아무리 그것이 순수하다고 해도 없는 일이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신사숙녀는 이 하녀와 같은 계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230-231p)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 이치를 알게 된다. 세상 이치를 알게 된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나날이 위험이 많아져 방심할 수 없게 된다. 교활해지는 것도 비열해지는 것도, 표리 두 겹으로 된 호신용 옷을 걸치는 것도 모두 세상 이치를 아는 결과이며, 세상 이치를 안다는 것은 결국 나이를 먹는 죗값이다. 노인 중에 변변한 자가 없다는 것도 같은 이치다.(250-251p)

 

 

걱정하지 않는 것은 걱정할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아무리 걱정한들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도 삼면에서의 동시 공격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단언할 만한 근거는 없지만,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안심하는 데는 편리하다. 안심은 만물에 필요하다.(263p)

 

 

원래 다른 사람을 놀리는 일은 재미있는 법이다. 나 같은 고양이조차 때때로 이 집 딸들을 놀리며 노는 정도인 만큼 낙운관의 군자들이 고지식한 구샤미 선생을 놀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불만인 것은 아마 놀림을 당하는 당사자뿐이리라. 놀리는 심리를 해부해보면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로, 놀림을 당하는 당사자가 태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놀리는 자가 세력이나 숫자에서 상대보다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주인이 동물원에서 돌아와 감동한 모양인지 열심히 이야기한 적이 있다. 들어보니 낙타와 강아지가 싸우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강아지가 낙타 주위를 질주하듯 돌며 짖어대는데 낙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등에 혹을 단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아무리 짖고 사납게 대들어도 상대를 해주지 않자 강아지도 끝내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그만두었다. 낙타가 실로 무신경하다고 웃었지만, 그것이 이 경우의 적절한 예다.

놀리는 자가 아무리 능숙해도 상대가 낙타처럼 굴어서는 놀림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자나 호랑이처럼 상대가 너무 강해도 안 된다. 놀리자마자 갈가리 찢기고 만다. 놀리면 이를 드러내며 화를 낸다. 화를 내기는 하지만 이쪽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 안심할 수 있을 때 그 유쾌함이 상당히 큰 것이다.(373-374p)

 

 

핀스케나 기샤고가 무슨 말을 하건 모르는 체하고 있으면 되지 않은가. 어차피 시시한 얘기일 테니까. 중학교 학생 따위를 신경 쓸 가치가 어디 있겠나. , 방해가 된다고? 담판을 짓는다고 해도, 싸움을 한다고 해도 그 방해가 없어지지는 않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는 서양인보다 옛날 일본인이 훨씬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요즘 적극적, 적극적이라며 서양인의 방식이 상당히 유행하는 것 같은데, 그건 큰 결점을 갖고 있네. 무엇보다 적극적이라고 하는 건 한계가 없는 이야기 아닌가. 아무리 적극적으로 한다고 해도 만족이라는 영역이나 완전이라는 지경에 이를 수는 없다는 말이네. 맞은편에 노송나무가 있다고 하세. 그게 시야를 가린다고 없애버리면, 그 너머에 하숙집이 또 방해가 되네. 하숙집을 철거하게 하면 그다음 집이 또 눈에 거슬리게 되지. 아무리 가도 끝이 없는 이야기라는 거지. 서양인의 방식이라는 게 다 이런 거네. 나폴레옹도 그렇고 알렉산드로스도 그렇고, 이겨서 만족한 이는 한 사람도 없었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싸움을 하고, 상대가 손을 들지 않으면 법정에 호소하고, 결국 법정에서는 이기겠지. 하지만 그것으로 결말이 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네. 아무리 안달한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마음의 결말이라는 건 아는 게 아니라는 거지.

과두정치가 안 되니까 대의정치를 하고, 대의정치가 안 되면 또 다른 것이 하고 싶어지지. 강이 건방지다고 다리를 놓고, 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터널을 파네. 교통이 귀찮다며 철도를 깔지. 그렇다고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는 없네. 그래봤자 인간인데, 얼마나 적극적으로 자기 뜻을 관철할 수 있겠나. 서양 문명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일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만족하지 못하고 평생을 보내는 사람이 만든 문명인 셈이지. 일본 문명은 자기 이외의 상태를 변화시켜 만족을 구하려는 게 아니네. 서양과의 큰 차이점은, 근본적으로 주위 조건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가정하에서 발달했다는 점이지. 서양 사람들처럼 부모 자식 관계가 좋지 못하다며 그 관계를 개량해서 안정을 찾으려고 하지 않네. 부모 자식 관계는 지금까지 있었던 그대로 도저히 바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관계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지. 부부 관계나 군신 관계도 그렇고, 무사와 평민도 그렇고, 자연 자체를 보는 것도 그러하네.

이웃한 지역으로 가야 하는데 산이 가로막고 있다면 산을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을 하는 대신 이웃한 지역으로 가지 않아도 될 궁리를 하지. 산을 넘지 않아도 만족하는 마음을 키우는 거라네. 그러니 보게나. 선가에서도 유가에서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네. 자신이 아무리 뛰어나도 세상은 도저히 자기 뜻대로 되지 않지. 지는 해를 다시 뜨게 하는 일도, 가모가와 강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일도 할 수 없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이지. 마음만 자유롭게 하는 수양을 한다면 낙운관의 학생들이 아무리 시끄럽게 굴어도 태연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질그릇으로 만든 너구리라 놀려도 신경 쓰지 않고 있을 수 있겠지. 핀스케 같은 녀석이 어리석은 말을 하면 이 바보 같은 녀석하고 넘어가면 될 일 아닌가.(415-417p)

 

 

하지만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을 때, 자아가 위축되었을 때는 거울을 보는 것만큼 약이 되는 일도 없다. 미추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얼굴로 용케 사람입네 하고 오늘날까지 거만하게 살아왔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다. 인간의 생애 가운데 그걸 깨달을 때가 가장 다행스러운 시기다. 스스로 자신이 바보임을 아는 것만큼 존경스럽게 보이는 것은 없다. 이 자각성 바보 앞에서는 온갖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머리를 조아리고 황송해 해야 한다. 당사자는 당당하게 자신을 경멸하고 조소하더라도, 이쪽에서 보면 그 의기양양한 모습이 머리를 조아리며 황송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430p)

 

 

주인은 뭐든 잘 모르는 것을 존중하는 버릇이 있다. 꼭 주인만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잘 모르는 것에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잠복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것에는 어쩐지 고상한 마음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속인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떠벌리지만, 학자는 아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설명한다. 대학 강의에서도 모르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평판이 좋고, 아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은 인망이 없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주인이 이 편지에 탄복한 것도 의미가 명료해서가 아니다.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해삼이 나온다거나 너무 고달픈 나머지 싸지른 똥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인이 이 문장을 존경하는 유일한 이유는 도가에서 도덕경을 존경하고, 유가에서 역경을 존경하고, 선가에서 임제록을 존경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멋대로 주석을 붙여 아는 체만은 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존경하는 것은 예로부터 유쾌한 일이다.(438-439p)

 

 

메이테이 선생은 주인이 고집을 부릴수록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주인은 자신이 고집을 부릴수록 메이테이 선생보다 대단해진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이 엉뚱한 일이 간혹 있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이겼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 사람의 인간적 가치는 뚝 떨어지고 만다. 고집을 부린 당사자는 죽을 때까지 자기 체면을 세웠다고만 생각하고, 그때 이후 사람들이 경멸하며 상대해주지 않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행복을 돼지의 행복이라 부른다고 한다.(461p)

 

 

주인은 울거나 웃거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걸 남보다 두 배는 하는 대신 어느 것이나 길게 가는 일이 없다. 좋게 말하면 집착이 없고 심기가 마구 변한다고 하겠지만, 이를 속된 말로 쉽게 말하자면 속이 깊지 못하고 경박한 데다 콧대만 센 응석받이다.(480-481p)

 

 

그래서 자기 자식이면서도 조금은 벅차하는 것이다. 벅차할 거라면 낳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을 정의하는 데 다른 것은 필요 없다. 그저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내 스스로 괴로워하는 존재하고 하면 충분하다.(484p)

 

 

인간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뭔가 풍파가 있을 때를 택하지 않으면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평소에는 대부분 그 사람이 그 사람이어서 보고 들어도 신명이 나지 않을 만큼 평범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평범함이 갑자기 영묘하고 신비한 작용 때문에 뭉게뭉게 피어올라 기이한 것, 이상한 것, 묘한 것, 색다른 것,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고양이들이 볼 때 알아두면 앞으로 도움이 될 사건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나타난다.(508-509p)

 

 

생면부지의 사람을 위해 눈살을 찌푸린다거나 콧물을 짠다거나 탄식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경향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정이 많고 배려심 넘치는 동물이라는 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만 세상에 태어난 세금이라 치고, 때때로 교제를 위해 눈물을 보인다거나 딱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다. 이를테면 눈속임 표정인데, 사실은 상당히 힘든 예술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눈속임에 뛰어난 사람을 예술적 양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며 대단히 귀히 여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인간만큼 수상쩍은 이도 없다. 시험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 여러분은 우리 주인 같은 선인(善人)을 냉담하다는 이유로 싫어해서는 결코 안 된다. 냉담은 인간 본래의 성질이고, 그 성질을 숨기려 애쓰지 않는 이는 정직한 사람이다. 만약 여러분이 이럴 때 냉담 이상을 바란다면, 그거야말로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직함조차 동이 난 세상에서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바킨의 소설에서 시노나 고분고 등 여덟 겐시들이 뛰쳐나와 건너편 이웃으로 이사라도 오지 않는 한 어림도 없는 무리한 주문이다.(519-520p)

 

 

바둑을 발명한 자가 인간이니 바둑판에 인간의 기호가 나타난다고 한다면, 답답한 바둑돌의 운명은 좀스러운 인간의 성품을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바둑돌의 운명으로 인간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이란 천공해활한 세계를 스스로 좁혀 자기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자리 밖으로는 절대 나갈 수 없도록 잔재주를 부려 자신의 영역에 새끼줄을 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인간이란 구태여 고통을 바라는 존재라고 평해도 좋을 것이다.(533p)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현암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