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from Life 2017. 9. 18. 13:14

1. 자신이 조금이나마 들어봤다고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본다. 그 조금의 정보조차 부정확하게 거론하고 사람 이름 서넛을 주워섬기는걸 보고 있자니 안쓰럽다. 대단한 기대를 한 게 아니었음에도 듣고 있기가 고역이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 사람이 떠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야말로 허공에 부유하는 알맹이 없는 말들의 잔치. 나라고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내가 말할 때도 다른 사람들이 이와 같이 생각할 수 있다고 느낀 자아성찰의 시간이었다. 항상 삼가는 마음을 가지며 아는 것만 적확하게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 실행해 옮기는 건 어렵다.



2. 책을 읽는 게 소수의 대단히 호사스런 취미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고 얼마나 읽겠냐마는 주변 사람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들이 한 권의 책이라도 읽었다는 얘기는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나마 즐기는 여가라면 대한민국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영화감상일 텐데, 영화도 책을 소비하는 방식과 사정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 크게 보면 양상이 비슷하다고 할까. 책을 안 읽는다지만 책도 책 나름이라 자기계발서, 설민석이나 김제동 등의 책, 읽기 편한 에세이는 잘 팔린다. 반면에 인문학이나 철학 영역에서 결국 읽히고 팔리는 건 하룻밤 만에 읽는 철학사나, 한 권으로 읽는 인문학 따위의 책이다. 과학쪽은? 말해 뭘할까. 영화도 마찬가지다. 팔리는 영화는 데이트용 팝콘 무비. 조금만 불쾌한 묘사가 나온다거나, 자신의 지적 수준에 걸맞지 않게 아주 조금 난해하다거나 지루하다면 관객은 외면한다. 뭐든 쉬워야 한다.



3-1. 주말을 이용하여 영화를 몇 편 봤다. 아메리칸 메이드와 윈드 리버는 평범했다. 도입부터 시선을 사로잡으며 참신하게 영상과 음악을 연결하는 재미를 줬던 베이비 드라이버는 매우 좋았다. 편집이 조금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개연성에 의문이 드는 장면도 있었지만 충분히 준수했다. OST를 찾아봐야겠다. 집으로 돌아와 같은 감독의 '더 월즈 엔드'를 봤는데 이 영화도 만족스러웠다. 에드가 라이트의 영화답게 여전히 음악은 빠지지 않았지만 거의 액션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액션신이 훌륭했다.



3-2. 주말의 영화관 나들이는 오랜만이었는데 어디서 돈 주고도 못 볼 진기한 구경거리를 봤다. 관객으로 거의 꽉 찬 영화관에서 내 옆자리 커플이 서로를 물고 빨고 난리도 아니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경험이라 계속 쳐다볼까하다가 그동안 눈에게 충분히 못할 짓을 많이 한 것 같아 애써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커플이 시종 대화를 멈추지 않았고,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팝콘과 나초를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음료의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빨대소리를 내며 알뜰살뜰하게 마셨다는 사실은 덤이다. 역시 누가 뭐래도 영화는 주중에 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운 것이다.



4. 해야 할 게 많다. 누가 시킨 건 아니지만 미술사 강의도 들어야 하고, 탐욕스럽게 빌려온 책도 반납기일 전까지 읽어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하고, 본 영화와 관련된 영화도 봐야하고, 영어 공부도 해야 한다. 물론 즐거운 일들이지만 오늘부터 그 어느 것 하나 하지 않아도 삶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들을 하려고 공연히 사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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