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7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인가ㅋㅋㅋ. 너무너무너무 시원한 말이다.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자들에게 매번 하고 싶은 말이다. 저자의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다.

 

 

 

 

다수의 의견은 늘 옳다는 시각을 ‘민주주의의 오류’라고 한다. 믿는 사람의 수에 따라 어떤 믿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영국이 두 번째 이라크 전쟁에 개입한 것이 비민주적이었다고 주장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간단한 오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여론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하면 참전 결정이 민주주의의 위반이라는 논리의 허약함은 단번에 드러난다.

다수의 의견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좋든 싫든 다수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민주주의와 다수결주의를 혼동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오는 정부 체제지만, 그 권력은 대의제를 통해 행사된다. 반면에 단순한 다수결주의는 정부가 늘 다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민주주의는 다수결주의가 아니다. 쉬운 예로 영국이 다수결주의에 따라 운영된다면 여우 사냥은 벌써 오래전에 금지됐고, 사형제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동물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나라가 됐을 것이다. 서구에서 다수결주의를 선호자니 않는 데는 소수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차원도 있지만 다수가 틀릴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구의 다른 나라들처럼 영구도 대의민주주의 모델을 채택하고 있다. 여기서 선출된 의원들은 유권자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는 대표자이지, 유권자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대리인이 아니다. 그 대신 4~5년마다 전반적인 활동에 따라 평가되고, 표로 심판받는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에서 의회가 다수 유권자의 뜻을 거스르는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그걸 비민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가능성 자체가 다수결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나누는 특징이다. 국민이 선출한 영국 의회는 파병 결정을 내렸고, 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 표의 평가를 받아 재선되거나 물갈이될 것이다. 이게 민주주의의 패러다임이다.(21-23p)

 

 

확증 편향은 정치도 오염시킨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주장에 설득 당한 블레어와 부시는 그 후로 그 믿음을 강화하는 증거를 더 비중 있게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다. 나름대로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을지 모르지만, 어떤 것이 한 번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머릿속에 새겨지면 모든 증거 자료를 공평무사하게 판단하기란 무척 힘들다.

그런가 하면 부시와 블레어에게 이기적인 동기가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두 지도자가 실수는 했을지언정 최선을 다했다는 쪽의 증거는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대량살상무기와 관련해서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를 순수하게 따져봐야 하는 문제는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뚜렷한’ 증거 앞에서 더 따지고 말 게 없는 명백한 사실이 되며, 반박 증거는 간단히 무시된다.(61p)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진화론이 “학설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진화론은 실제로 학설이다. 그게 진실인지 확실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조금 진부하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확실히 아는 건 하나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지구의 직립원인이 아니라 켄타우루스 알파성의 가상현실 기계 속에서 평범한 지구 생명체라는 환상에 접속한 도마뱀일지도 모른다. 희박하기는 해도 여전히 가능한 일이며, 이걸 비롯한 수많은 환상에 속고 있지 않다고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다.

학교에서 완벽하게 확인된 사실만을 가르친다면 아마 가르칠 게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을 만한 압도적인 증거가 존재하는 것들을 가르친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도 확신의 철옹성이 아니고, 단지 수긍할 만한 의혹이 없거나 개연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믿음이다. (...) 진화론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무수한 과학적 가설만큼이나 증거가 탄탄하다는 데 거의 모든 과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진화의 구체적인 방식에는 불확실한 점이 남아 있지만, 생명이 지구상에서 진화했다는 주장만큼은 지금 통용되는 어떤 과학적 가설 못지않게 확실하다.

그래서 교육위원회는 그게 논란의 종지부라도 되는 것처럼 사실/학설의 구분을 들먹이면서 학설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덧붙였지만, 일반대중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진화론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과학적 논란이 개입되는 지점은 진화 과정의 구체적인 부분들일뿐 진화 자체는 아니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것에는 일단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하다는 건 정도의 문제다. 그 정도가 낮다고 해서 늘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건 아니다. 확률은 낮지만 여전히 가능한 일이라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갖는 걸로 충분할 때가 많다. 올바른 사고는 믿음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지나치게 부풀리지도 않고, 오류불감증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71-72p)

 

 

희대의 악당이 좋아하고 지지하고 즐겨했다는 이유만으로는 비판이 성립되지 않는다. 악마가 사랑을 했다고 해서 사랑이 나쁜 짓이 될까? <나의 투쟁>도 책이었으니 책이라면 전부 금지해야 할까? 폴 포트가 역사와 지리 교육을 실시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과목들을 시간표에서 빼야 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오로지 어떤 사악한 손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게 나쁘거나 잘못된 것으로 변질되는 건 아니다. 뭔가가 잘못됐다면 유유상종이라는 식으로 빈정거리는 대신 왜 잘못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75p)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사후합리화의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불편한 과거의 진실을 감당하기가 한결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내린 결정을 돌이켜 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늘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뭐가 최선인지 알아보기 위해 노력했을까? 가끔은 잘못된 이유에서 잘못된 행동을 저질렀다고, 그러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얘기하는 게 훨씬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87p)

 

 

다른 사람의 진정한 동기를 거침없이 단언하는 데 동원되는 건 얼치기 대중심리학의 법칙들이다. ‘부정의 반비례 법칙’도 그중 하나인데, ‘지나치게 반박이 너무 많은 여성의 전략’이라고도 하며, 뭔가를 부정할수록 그게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남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게이라는 말에 펄쩍 뛰는 아이는 틀림없이 게이다.

이와 더불어 많이 거론되는 ‘증오는 곧 두려움의 발로 법칙’은 ‘겁먹은 고집불통 반응’이라고도 한다. 뭔가를 싫어하는 내색을 하는 건 사실은 두려움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자기만 옳은 줄 아는 학부생쯤은 되어야 이런 법칙을 노련하게 적용할 수 있다.

이밖에도 ‘불안으로서의 오만의 동의어 법칙’이 있는데, ‘부드러운 중심의 원칙’이라고도 한다. 자신감이 과하다 못해 오만해 보이는 사람은 십중팔구 그걸로 뿌리 깊은 불안감을 덮으려 한다는 뜻이다. 오만한 마초들이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

그런데 이런 법칙들의 문제는 전부 헛소리라는 데 있다. 물론 동성애자냐는 말에 지나치게 발끈하고, ‘호모’를 싫어한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며, 총각 파티라도 열리면 어네스트 헤밍웨이 뺨칠 만한 마초 기질을 발휘하는 남자가 실제로 다른 남자를 향한 욕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편견에 사로잡힌 동성애 혐오 마초일 가능성도 있다. 개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뭔가를 부정할 때는 정말 그렇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은 무심코 하는 말이라지만 진실을 바로잡는 것이 본인에겐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얼그레이를 싫어하지만 그걸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불안감 따위가 없기 때문에 오만하게 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점들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런데 지적인 토론에서조차 이런 식으로 얼치기 심리학을 들먹이며 엉터리 일반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111p)

 

 

그의 논리는 “우리 할머니는 하루에 담배를 20개비씩 피웠지만, 101세까지 사셨다”고 주장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담배를 피우면 무조건 그 흡연 습관 때문에 죽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수명이 단축될 가능성이 급격히 증가한다는 것뿐이며, 100세가 넘은 골초 한 명으로 인해 그게 거짓이 되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건강하게 오래 살 방법들도 많지만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으면서 매일 운동을 하며 적정 체중을 유지했던 사람이 서른두 살 젊은 나이에 돌연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해서 이런 일반적인 사실이 뒤집어지는 것도 아니다.(121p)

 

 

이런 걸 ‘무오류의 논리’라고 하는데, 아무것도 그 논리의 허위나 잘못을 드러내는 증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다. 인간은 누구나 불안을 느낀다면서 몇몇 사람들이 불안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불안을 은폐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사르트르의 말 역시 이와 유사한 무오류의 논리로 보인다. 사르트르의 경우에도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사례는 존재할 수 없다. 전혀 불안해 보이지 않더라도 불안을 은폐하거나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는 거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125p)

 

 

세상의 어떤 사실도 모든 의구심을 해소하는 수준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압도적인 증거만 있을 뿐 진실로 입증되지 못한 사실이 논쟁의 주제가 될 경우 상황은 모호해진다. 흡연과 암의 상관관계에 대한 주장이 여기에 해당된다. 흡연이 폐암의 주요 원이이라는 대단히 강력한 증거가 있지만, 회의론자들이 한 단계 높은 증거를 요구하며 과학적으로 입증된 게 아니라고 주장할 만한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다른 가능성들도 배제되지 않았으며, 흡연이 주범이 아닐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궤변에 넘어가면 곤란하다. 논리적으로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려는 술책이다. 과학이 틀릴 수 있다는 소리도 진부하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오류의 여지가 있으며, 무오류를 요구하는 것은 주제가 허락하는 만큼의 엄밀함만을 기대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명한 충고를 무시하는 처사다. 진정한 보드카 애호가처럼, 진실에서도 100퍼센트의 순도를 고집하면 안 된다. 약간의 불확실성은 감수해야 한다. 증명은 합리적인 의구심을 해소하는 수준이어야 한다. 단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해서 판단을 보류해서는 안 되지만, 널리 받아들여진 과학적인 사실도 뒤집힐 수 있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일례로, 과학철학자인 장하석은 물의 비등점이 순도와 기압뿐만 아니라 용기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는 내용의 논물을 발표했다. 공학자들은 이걸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걸 과학이 입증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약간의 의구심 때문에 판단을 보류하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가장 확실한 믿음이라도 여지없이 뒤흔들 증거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극단적인 회의와 열정적인 믿음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170-171p)

 

 

하지만 어떤 상황인지 잘 알면서 그 직업을 선택했다면 일이 아무리 위험하고 고되더라도, 각자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니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로서는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으니, 반가운 소리다. 그러나 동의를 했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은 몇 가지 이유에서 오류가 있다.

첫째, 사람들이 가끔 끔찍한 선택을 하는 이유는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매춘이 좋은 예다. 궁지에 몰려서 발을 들인 게 아니라 직업으로 그 일을 선택한 여성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많은 경우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뛰어든다. 물리적으로 강압하지만 않는다면 매춘이 착취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이만저만 착각이 아니다.

둘째,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해서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괜찮아지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개도국의 공장에서는 노동자에게 화장실을 다녀올 시간조차 넉넉히 허락하지 않고, 마실 물도 제공하지 않으며, 그 나라의 보건 및 안전 법규를 준수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그 지역의 노동자들에겐 이런 공장이나마 다닐 수 있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해서 그 런 상황을 외면해도 되는 걸까? 서구의 소비자들이 약간의 돈을 더 지불해서 이런 참담한 상황을 해소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

‘고지에 따른 동의’라는 개념은 위험과 혜택에 대해 설명을 듣고 쌍방동의하에 법적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서명하는 경우에도 적용된다. 이런 사례는 투약과 수술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의료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환자에게 동의를 거부할 자유가 있을까? 나보다 전문가인 의사를 신뢰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런 의사의 판단이 잘못됐을 경우, 환자가 동의를 했으니 불평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택이 명실상부하게 오로지 당사자만의 문제가 되려면 강요에 의한 게 아니라 전후의 상황을 충분히 숙지하고 내린 선택이어야 하며, 그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이 합리적인 기대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공정한 것이어야만 한다.(178-179p)

 

 

절반의 진실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 사이의 틈을 교묘히 악용한다. 허위 사실을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전체를 다 얘기하지 않아도 진실을 전달하지 못할 수 있다.

(...)

절반의 진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거짓 암시의 기미를 전부 제거하기 위해 드러내고 밝혀야 하는 괄호 속의 말들, 뒤에 감춰 뒀던 말들을 생각해 보라. 지방을 줄였습니다(하지만 여전히 높지요), 사랑해(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야), 셔츠 색깔 근사한데(하지만 모양은 형편없어).(200-201p)

 

 

뭔가가 자연스럽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사실(어쩌면 이 경우에는 가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자체일 뿐, 어떤 관행의 도덕적인 바람직함을 결정하는 잣대가 아니다. 그렇게 치면 약에 취해 의식을 잃는 것보다 마취를 하지 않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을 하는 게 도덕적으로 더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실제로 어떤 상황이 자연스러운지 아닌지의 여부가 그 상황의 당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걸 존재와 당위의 간극이라고 하는데, 데이비드 흄이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에서 처음 거론했다. 흄의 논리는 간단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발로 차면 아프다는 사실로부터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발로 차면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을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나쁘다‘와 같은 가치를 개입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치를 이끌어내려면 가치를 투입해야 한다. 가치는 단순한 사실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존재와 당위의 간극을 둘러싼 논쟁은 상당히 복잡해졌고, 많은 철학자들이 그 간극은 좁힐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입증하지 않은 채 사실에서 가치로 비약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을 논할 때면 종종 존재와 당위의 간극이 무시되곤 한다. 예를 들어 가끔 일부일처제가 자연스럽지 않다거나, 남자들의 성적 강압 행위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주장을 접하게 된다. 설사 이런 주장들이 참이라 하더라도,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도덕 중에는 진화의 성향에 역행하는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일례로,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이 가까운 피붙이의 이익을 타인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도록 진화해 왔다고 얘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건이 월등히 뛰어난 남을 제쳐놓고, 일가친척을 고용하는 게 정당화되지는 않는다.(212-213p)

 

 

그게 끔찍하다는 사실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을 타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맥캔 부부는 공식 용의자이며, 그들이 그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엄존한다. 물론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되고, 그런 차원에서 나 역시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범죄의 끔찍함이 어떻게 무죄를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삶의 부조리’가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무게를 실어준다고 주장한 신학자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의 논리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한 부조리가 어떤 식으로든 논리적이라면 이런 주장도 통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의미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최소한 내가 인용한 글의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말한 부조리는, 신이 없는 삶은 부조리하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알베르 카뮈의 그것과 유사하다. 무의미하고 헛되기 때문에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어쩌면 삶이라는 게 무의미하고 헛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무신론자라고 해서 반드시 이렇게 염세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건 신의 존재를 바랄 이유는 될지언정, 실제로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근거는 되지 못한다. 가끔은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인 것들이 있다. 아니, 끔찍한데도 불구하고 진실인 것들은 아주 많다.(216-217p)

 

 

정치인들이 상식에 호소하는 건, 그야말로 상식적이다. 엘리트 지식인들은 비록 부족하다는 소리를 종종 들어도, 누구나 자기는 풍부하게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이 상식이다. 상식은 민주적이며, 단순하고 자명하다. 그러니 누가 상식에 반하는 주장을 하려 할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상식은 진실의 지표로는 빈약하며, ‘참’이라는 딱지, 뭘 신뢰할 수 있고 어떤 것이 실용적이거나 유효한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을 설득하기엔 부족하다.(219p)

 

 

이렇게 엄청난 양의 증거가 눈앞에 펼쳐진다면 누구라도 최소한 잠시나마 판단력이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데, 양은 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함량 미달의 증거는 아무리 많아봐야 죄를 입증할 수 없다. 그런 증거들은 쓸데없이 압도적일 뿐이다.

(...)

0에 0을 더해봐야 0일 뿐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사람들은 함량 미달인 증거들이 쌓이면 함량이 채워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미국이 가짜 테러 공격을 계획한 적이 있으며, 무인비행기를 실험 했고, 심지어 세계무역센터를 표적으로 여겼던 것이 정말 우연의 일치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전부 미국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생각했었다고 우리가 짐작하는 것들일 뿐이다.

유령 같은 초자연 현상에 대한 증거도 같은 식으로 축적된다. <꼴통들을 위한 유령 가이드>라는 제목은 참 잘 지었는데, ‘환영과 유령 현상을 다룬 보고서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만으로 ‘저 밖엔 뭔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믿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질이다. 유령을 봤다는 그럴듯한 증거가 조금이라도, 아니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쭙잖은 일화들을 아무리 늘어놔봐야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심지어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유령을 봤다는 주장이 수천 건인데, 조사해 봤더니 단 한 건도 사실로 입증되지 않았다면 유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 될 테니 말이다.

0을 아무리 더해봐야 1이 되지 않고, 사례를 더한다고 개연성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 개연성이 10퍼센트인 증거가 10가지라고해서, 그 일의 발생 확률이 100퍼센트가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각각의 증거는 오히려 같은 결론, 즉 그 일의 확률이 희박하다는 결론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는 직관적으로 뭔가가 사실일지 모른다는 증거가 수십 가지일 경우, 그게 합쳐져서 개연성을 높여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차가 충돌할 확률을 계산할 방법이 10가지인데, 각각 55~65퍼센트의 답이 나왔다면, 기차가 충돌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도 타당하지만 그래봐야 확률은 여전히 60퍼센트 안팎일뿐이다.(248-250p)

 

 

위의 기사는 전형적인 ‘공포 장사’의 수법이다. 위험을 지적하되, 그 위험이 지극히 경미한 수준이라는 사실은 간단히 처리하거나 심지어 밝히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피뢰침 방문판매업자의 교묘한 마케팅과 비슷하다.

“선생님의 집에, 네, 바로 이 집에 내일 당장 번개가 떨어져서 그로 인한 화재로 선생님과 온 가족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가요? 그런 위험을 감수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어쩌면 이렇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른다. 집에 번개가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걸 피하기 위해 거액을 쓸 만큼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위험에 대해 떠들면서 이런 전후 사정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걱정에 휩싸이는 게 당연하다. “냄비 때문에 치매에 걸릴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어머, 그런 줄은 또 몰랐네. 이걸 어째? 안전한 냄비를 새로 사야겠군·····.

영국인들이 먹는 음식에 “유해한 살충제 성분”이 들어 있다면서도 함유량은 밝히지 않은 린은 사람들을 필요 이상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미량에 불과한데도, 지금 마신 물에 비소가 함유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린의 글에서 이런 살충제들의 함유량이 위험한 수준이라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더 놀라운 건, 린이 “발암성분에 관한 한 안전한 수치란 없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믿음”이라는 말로 이런 비판을 원천봉쇄했다는 사실이다. 즉 함유량이 아무리 낮아도, 유해한 살충성분이 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걱정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노골적인 거짓이거나, 최소한 액면과 다르다. 예를 들어 후추도 발암물질로 드러났으며, 홍차와 커피에 들어 있는 타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믿을 만한 전문가들 중에 홍차를 마시거나 파스타에 후추를 뿌리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발암성분이 효력을 발휘할 만큼 많은 양을 소비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77-278p)

 

 

불합리한 추론에서 중요한 건 주장하는 내용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다. 예를 들어 “나는 치즈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오늘은 화요일이다”라는 말은 불합리한 추론인데, 오늘이 화요일이라는 게 내가 치즈를 좋아한다는 사실과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이 화요일이라는 것과 내가 치즈를 좋아한다는 건 둘 다 사실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사담 후세인이 불합리한 추론의 달인이라는 것만으로는 미국이 세계의 석유 통제권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거나, 이라크의 파괴를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는 게 입증되지 않는다. 단지 후자와 전자의 논리적 연결고리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이어지거나 말거나, ‘그러므로’와 ‘그리하여’를 남발하는 것 같다.(281p)

 

 

자만심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경계할 것. 절대로 자신의 논리는 합리적이라고 과신하지 말 것. 자신의 추론에서도 늘 빈틈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두 번째는, 명석함과 아둔함, 좋은 논증과 허술한 논증을 나누는 경계선이 선명할 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

제아무리 합리적인 논증도 과도한 수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수사적인 표현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유머라는 양념도 없이 늘 중립을 지키려 한다면 너무 건조한 텍스트만 난무할 테니까. 우리가 읽고 쓰는 것 중에 수사학적 표현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건 드물다. 이런 장식은 좋은 주장의 설득력을 높여주고, 독서를 더 즐거운 경험으로 만들어준다. 수사학이 문제가 되는 건 엉성한 추론에 쓰일 때뿐이다.

그래도 미사여구가 합리적인 논증을 대체할 수는 없으므로, 이성의 편에 서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오류의 가능성을 늘 경계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에게서 찾아냈을 때 비판을 아끼지 않는 설득의 꼼수를 자신도 과다하게 사용하지는 않는지 주의해야 한다.(288-289p)

 

 

 

ㅡ 줄리언 바지니, <가짜논리> 中,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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