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0

 

 

영화 빅쇼트는 아래와 같은 마크 트웨인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It ain't what you don't know that gets you into trouble. It's what you know for sure that just ain't so.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너무나 무식해서 자신이 잘못 알고 있을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어리석음. 전문가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 어떠한 학문적인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수준 낮은 이해력. 한 표의 가치가 모두에게 동등하다는 정치적 평등을, 모두의 의견과 수준은 비슷하며, 그런 이유로 모두의 의견이 같은 정도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상한 평등으로 바꿔버리는 어찌할 수 없는 무지함. 그 밖에도 끝이 없다. 하긴 다수결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의 차이도 모르는 자들에게 뭘 기대할까.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거의 책의 전문을 옮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화가 나다가도 무력한 감정과 씁쓸함을 느낀다. 시대의 반지성주의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제 우리는 정반대 방향으로 와버렸다. 전문가의 말을 들으면서 건전한 회의를 품는 대신에,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전문가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틀린 말을 하고 있다고 대놓고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소위 ‘인텔리’ㅡ요즘 다시 자주 출몰하고 있는 이 말은 이제 주로 경멸조로 쓰이고 있다ㅡ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야유를 보내는 한편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약이 무엇이라고 의사에게 대놓고 이야기하거나, 아이가 쓴 시험 답안이 옳다고 박박 우기고 있다. 우리 모두 누구나 똑같은 수준으로 똑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다. 이보다 더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은 없다.(12p)

 

 

이제 사람들은, 정치 시스템 안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말을 어떤 이슈에 관해서건 개개인의 의견이 동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뜻이라고 잘못 믿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이런 생각을 신봉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이처럼 극도로 단순화된 평등주의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할 뿐만 아니라, 종종 사태를 위험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경우까지 생기게 한다. 이 책은 전문지식에 관한 책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전문가와 일반 시민들 간의 관계를 다룬 책이다. 그 관계가 어째서 무너지게 됐는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시민 혹은 전문가 입장에 놓은 우리 모두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 방안을 모색하는 책이다.(23p)

 

 

교육은 아무리 똑똑하거나 재주가 많은 사람일지라도 그를 일평생 배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약간의 배움이 교육의 시작이 아니라 종착점이 되어 버린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26p)

 

 

옛날에는 지식층의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았기에 지식인들이 그저 가벼운 놀림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그들의 도움이 너무 많이 필요하기에 강한 적대 의식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44p)

 

 

하지만 전문지식의 죽음은 일반인들의 평균적 정보 수준이 낮았었다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문제다. 문제는 확립된 지식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그런 지식에 대한 적극적인 적대감의 출현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문화에서 새로 나타난 현상이다. 이제는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관해서건 모든 의견이 똑같이 타당하다고 우기면서, 전문가의 견해나 확립된 지식을 서슴없이 자신의 의견으로 대체하려 한다.(46p)

 

 

하지만 우리는 전문가에 관한 한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아닐지도 모르는 평범한 전문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로는, 솜씨가 서투른 우리의 치과의사가 동네에서 가장 이를 잘 뽑는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가 당신보다는 낫다는 사실이다. 깨진 이를 때우는 치료와 충치 치료를 받으려고 치과대학 학장을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설령 우리가 운 좋게 자기 이 하나를 스스로 뽑을 수는 있어도, 매번 이를 뽑겠다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

두 번째는 상대적인 기술과 관련된 부분인데, 전문가도 실수를 하지만 보통 사람들보다는 실수할 가능성이 훨씬 더 적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 놓인 중대한 차이다. 전문가는 자기 일에서 일어날 만한 위험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들이다. 유명한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바 있듯이, 전문가는 “자기가 다루는 주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실수들과 그 실수를 피하는 법에 관해서 웬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다.”(71-72p)

 

 

더닝ㅡ크루거 효과는,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우매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우매하지 않다고 더 강하게 확신한다는 뜻이다. 더닝과 크루거는 그런 사람들을 좀 더 완곡하게 “미숙한 사람” 혹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부르지만, 그들이 찾아낸 핵심적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할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무능함 탓에 그런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한다.”

사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성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한번 물어보라.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아마도 평균 이상일 거라고 생각한다는 “평균 이상 효과”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더닝과 크루거가 담백하게 말한 바 있듯이, 이것은 “통계학적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인간의 약점이다.(88p)

 

 

이를테면, 가장 실력이 없는 사람이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 혹은 다른 사람이 옳다는 사실을 가장 알기 어렵고, 따라서 짐짓 잘 아는 척 꾸며낼 가능성이 가장 많으며, 그렇기에 뭔가를 배우게 될 가능성도 가장 적다는 말이다.(92p)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정말 암담하다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어느 정도, 전반적인 지능의 문제라기보다는 교육의 문제다. 어떤 사람들은 보통의 숫자에 대한 감각마저 없음은 물론 위험이나 확률 따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런 “숫자맹”보다 더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의 토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없다. 이 “숫자맹”이라는 인상적인 말은 수학자 존 앨런 폴로스가 만들어 낸 말이다. 비행기 여행이 위험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안전한 착륙 기록이 아무리 많다고 알려 줘도 소용이 없다. 그 많은 안전 운행의 기록이, 단 한 차례 있었던 사고에 대한 기억의 공포보다 더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2001년에 폴로스는 이렇게 썼다. “수에 대한 개념도 부족하고 확률에 문외한인 숫자맹들은 불가피하게 이런 그릇된 추론에 도달하고 만다. ‘그래요. 하지만 만약 내가 그런 일이 생기는 경우에 해당하면 어떡하죠?’ 그런 다음 자신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자신이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당신의 주장을 일거에 무너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인간은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내가 그 운 없는 경우면 어쩌죠?”라는 주장을 하는 데 있어 매우 창의적인 모습을 보인다.(96-97p)

 

 

위험 문제를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최근, 자기가 처한 위험이 어느 정도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드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 총을 두고, 안전벨트도 안 맨 상태에서 차를 몰고, 동맥경화를 유발하는 프랑스 음식을 즐겨 먹고 담배를 피우면서도, 걱정을 하나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에이즈 걱정을 한다. 정말 제정신들이 아닌 것 같다.

“엘런. 차사고로 죽을까봐 걱정 돼?”

“아니, 전혀.”

“살해될 걱정은?”

“아니.”

“음, 이거 알어? 우리가 에이즈 환자가 될 확률보다는 차 사고로 죽거나 강도에게 살해당해 죽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아.”

“정말 고마워.” 엘런이 대답했다. 짜증이 배인 목소리였다. “너한테 전화하길 잘한 것 같아. 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안심이 돼, 마이클.”

(...)

이런 편향이 반대 방향으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족은 쪽으로 예외에 해당하리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가 합리적인 낙관주의보다 비합리적인 두려움에 더 사로잡히는 까닭은 확증편향이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생존 장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은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하지만, 한 번 찾아온 죽음은 영원히 머무는 것이다. 우리 뇌는 항공 여행이나 원 나이트 스탠드에서 무탈하게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아닌 것이다. 한정된 정보 혹은 잘못된 정보에 의존해서 작동 중인 우리의 사고력은 어찌 보면 제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작은 위험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위험이 있다면 그것을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니 확증편향에 맞서 싸우려는 것은 인간 사고의 기본적인 기능ㅡ이것은 무슨 결함이 아니라 하나의 특성이다ㅡ을 고쳐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98-100p)

 

 

바로 이것이, 가능하면 과학자들이 같은 실험을 하고 또 해서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제출하는 이유다. 우리는 그 과정을 ‘학계 동료에 의한 검토’라고 부른다. 이때ㅡ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경우에ㅡ동료 및 선후배 전문가들은 악랄한 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맡게 된다. 비록 선의에 따른 것이지만 말이다. 그 과정은 일반적으로 ‘이중 은폐’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중 은폐란 연구자와 심사위원들이 서로 누군지 모르게 한다는 뜻으로, 개인이나 기관의 편견 또는 편향성이 논문 검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이것은 정말 소중한 과정이다. 아무리 정직하고 스스로를 잘 돌아볼 줄 아는 학자나 연구자라 해도, 연구 결과로부터 개인적으로 얻을 게 별로 없는 사람으로부터 연구의 타당성을 검증받을 필요가 있다.(103p)

 

 

사실 대부분의 경우 일반인들에게, 과학적 방법 같은 학문적인 장치는 전혀 필요 없다. 일상적인 문제는 상식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며, 보통은 그게 불필요하게 복잡한 설명보다 더 낫다. 예컨대 우리가 빗길에 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면 타이어가 지면에서 떨어지기 시작하는지 정확하게 알 필요는 없다. 정확한 해답을 알려줄 무슨 수학적 공식이 있을 테지만, 그런 공식 없이도 우리의 상식은 나쁜 날씨에 속도를 줄이라고 말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더 복잡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상식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원인과 결과, 증거의 성격, 통계적 확률 같은 것들은 상식만으로 다루기엔 훨씬 더 복잡한 부분이다. 풀기 어려운 수많은 문제들의 실제 답이 우리의 자연스런 상식을 거스르고 직관에 어긋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상식이라는 단순한 도구는 우리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크고 작은 실수에 취약하게 노출되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바로 일반인과 전문가들이 함께 토론할 때, 미신이나 민중의 전승 지혜처럼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게 만들고 있는 이유다.(105-106p)

 

 

예컨대, “중국 사람은 미국 사람에 비해 일반적으로 키가 더 작다”고 말하는 것은 일반화다. 이런 진술을 고정관념으로 오인하는 사람은 곧바로 예외를 찾으려 들 것이며, 그 즉시 토론은 시궁창에 빠져버리고 만다. “나는 중국 사람이 미국 사람보다 키가 더 작은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일반화하면 안 돼! 중국 출신의 농구 선수 야오 밍은 키가 2미터 28센티나 된다고!”

예외적으로 키가 큰 중국 농구 선수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보려면 미국과 중국에 직접 가서 사람들의 키를 잰 뒤에 우리의 가정이 얼마나 자주 들어맞는지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중국 사람들이 대체로 미국 사람들보다 키가 작은 게 확인 결과 사실이라면, 어떤 진술이 충분히 높은 빈도로 사실이라는 그 점에 주목하여, 절대불변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하나의 규칙이라고 주장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설명 과정에서 힘든 부분은 일반화를 한 다음이다. “‘어째서’미국 사람이 중국 사람보다 키가 큰가요?” “유전적 요인 때문인가요?” “아니면 식습관의 차이 때문인가요?” “환경적인 요인은 없나요?” 이 중에 해답이 있겠지만 그 해답이 무엇이건, 미국 사람이 중국 사람에 비해 키가 큰 경향이 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아무리 많은 농구 선수를 예외로 내세우더라도 결론이 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모든’중국 사람은 키가 작다는 말은 고정관념이다.(119p)

 

 

예컨대 2014년에 실시한 국가 간 연구 하나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던 적이 있다. 즉,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그들 사이에 상당한 우열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서로에게 공정한 시간을 할애하고, 모든 의견에 평등하게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연구자들은(이들 가운데는 중국, 이란, 덴마크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집단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필요 때문에 우리 인간 안에 만들어진 ‘평등편향’이라고 부른다. 반복되는 토론과 결정에 두 사람이 개입되어 있을 경우에ㅡ그리고 두 참여자 사이에 유대를 확립하는 일이 핵심적인 부분이라면ㅡ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자신의 견해를 더 옹호하는 경향이 있고, 오히려 더 실력 있는 사람들이 상대편의 관점이 명명백백하게 틀렸을지라도, 그 관점을 존중해 주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

이런 태도나 행동은 기분 좋은 오후를 보내는 데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어떤 결정을 하기에는 정말로 나쁜 방법이다. <워싱턴포스트>의 과학기자인 크리스 무니는 이런 사회 역학이 인간 관계라는 바퀴가 굴러가게 하는 데는 윤활유가 될 수는 있지만, 사실 관계가 걸려 있는 문제에서는 커다란 해를 끼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연구 결과에서 “우리가 전문가를 더 자주 찾아야 하며, 그들을 더 존중하고, 그들의 말을 더 경청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또 한편으로 우리의 사회적 집단 내 진화가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 모두의 눈을 가리고 집단 규범을 강화시키는지, 그래서 불편한 진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조차도, 우리의 대화가 얼마나 걷잡을 수 없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123-124p)

 

 

우리 모두는 자신이 문화적 교양이 없는 사람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항상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압력을 끊임없이 느끼고 있다. 힘 있는 사람 앞에서 단시간에 자신의 생각을 설득시켜야 하는 상황, 사업상의 만남, 그리고 칵테일파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마치 우리가 보고 읽고 감상하고 들은 것처럼 블로그에 올리고, 트위터에 글을 쓰며, 잡담을 나누고 논평하는 한편으로 문자를 보낸다. 페타바이트의 데이터 세례를 흠뻑 받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 내용을 직접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ㅡ그래서 그것에 ‘관한’수다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박식한 사람인 척 연기를 하는 것에 가까운 위험한 상태에 도달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무지의 새로운 모델이다.(126p)

 

 

명성 높은 과학자가, 대학 2학년생과 몇 분 동안 토론을 한 뒤에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학생은 마침내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했다. 학생은 마침내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의 설득을 포기했다.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음, 교수님이나 저나 정확히 모르기는 마찬가지죠 뭐.” 재스트로는 즉시 그 젊은이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아니, 아니에요.”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 예측이 학생 예측보다 훨씬, 훠얼씬 더 나아요.”

그 후 재스트로 교수는 세상을 떠났다. 하노버에 있는 동안 나는 그에게 강의실에서 그날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물어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그는, 대학생이건 시민이건 예외 없이 전문 지식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인생 수업 같은 것을 해주려고 한 것이리라 짐작한다. 이를테면, 대학 입학은 교육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지 교육의 끝이 아니며, 타인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게 그 사람의 ‘지식’에 대해서도 동등한 존중을 해 준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우주 미사일 방어시스템이 현명한 정책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경험 많은 천체물리학자의 예측과 대학 2학년생의 예측이 동등한 수준이었을 리는 없다는 점이다.(155-156p)

 

 

학점 부풀리기에 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은 그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과, 그로 인해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만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고등교육 기관들이 이처럼 명백한 학점 담합에 공모하고 있다. 그런 공모가 이루어진 것은, 한편으로는 대학 생활을 즐겁게 만들어 주어야 하고, 학생들이 기업에 매력적인 고용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해 줘야 하며, 불만에 찬 학생들의 교수에 대한 분노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시장의 압력에 이끌려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에서 차지하는 ‘자존감의 역할’에 관한 무책임한 생각에 이끌린 탓도 있다.(176-177p)

 

 

대학은 교육 받은 남녀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며, 학문적 연구 모델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더라도, 맞는 방향이라면 그것을 따르는 법을 배우게 만드는 차분한 환경이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대학들이, 어떤 다른 요인보다 감정을 가장 우선시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 학생들의 인질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이런 요구를 할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무슨 생각이든지 다 표현해도 되고 어떤 감정도 다 옳다고 받아주는 문화 속에서, 여태까지 쭉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182p)

 

 

인터넷 사용자 각자에게 나름의 관점이 깊숙이 자리 잡혀 있어서,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포머의 법칙’의 기초가 되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인터넷이 누군가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의견이 ‘없는’상태의 사용자를 ‘잘못된’의견을 가지도록 만드는 경우뿐이다.(195p)

 

 

어떤 면에서 인터넷의 편리함은 엄청나게 요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대부분, 이미 조사하는 법을 훈련받고, 어느 정도 자신이 찾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있는 사람들한테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포린 어페어스>나 <인터내셔널 시큐러티>를 온라인 판으로 구독하는 것이, 허겁지겁 도서관으로 달려 나가거나 사무실 우체통을 초조하게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편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보의 출처나 저자의 신임도를 판단하는 법을 배워 본 적 없는 학생이나 그런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얘기다.(199-200p)

 

 

“나는 미국 의학 협회, 미국 소아과 학회, 국립 보건원, 그리고 질병 통제 및 예방 센터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결국] 케네디는 자신이 그런 단체들보다 더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백신 반대 선동가들은 언제든지 자신들의 생각을 지지해 줄 학문적 이탈자나 아무 ‘연구 결과’라도 찾을 수 있다. 사이버 시대에는 이런 게 학식이다. 당신이 쫓고 있는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웹을 이리저리 검색하라. 당신의 생각이 옳음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마우스를 누르다 보면, 어느덧 단순히 어떤 웹사이트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어떤 주장의 타당성이 있다라는 사실을 혼동하게 된다.”(212-213p)

 

 

사실 인터넷 접속은, 한 주제에 깊이 파고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림들을 더 바보로 만들 수 있다. 정보 검색이라는 행위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를 배웠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자료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그 자료들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확률이 더 많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런저런 웹 사이트를 넘나들며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면 더 이상, 눈앞을 스쳐지나갔을 뿐인 것들과, 실제로 ‘알게 된’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215p)

 

 

검색 엔진과 함께 아침나절을 보냈다는 이유로 10년은 걸려야 쌓을 수 있을 만한 지식을 습득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을 계몽시킬 방법은 별로 없다. 일반인과의 토론에서 “저도 조사를 좀 해 봤답니다”라는 말을 듣는 때보다 더 심란한 순간은 없다. 삼투압 현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정보에 노출되는데도 불구하고 적어도 기본 지식조차도 전혀 늘어나지 않는걸까? 어떻게 그렇게나 글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그토록 아는 게 없을까? 답은 간단하다. 자신이 찾은 것을 제대로 읽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거다.(217p)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위키피디아는 인터넷이 전문지식을 대체했을 때의 한계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복잡한 주제에 관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황소의 무게를 추측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인 것이다. 선의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위키피디아 편집자로 자청해서 자신의 시간을 사용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일부는 나중에 위키피디아에 정보가 실리는 방식과 명백한 이해관계가 있는 기업이나, 유명인과 대중의 관계를 관리하는 홍보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설령 의도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위키피디아 같은 크라우드소싱 방식의 기획은, 일반인과 전문가 사이의 중요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차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자원해서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어느 시기에 자신의 관심을 끌었던 주제에 관해서 자유롭게 글을 쓰는 반면, 전문가들은 날마다 자신의 전문지식과 씨름하는 사람들이다. 취미가 직업과 같은 수는 없는 것이다. 영국 작가 앨러스테어 쿡이 이런 금언을 남겼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내키지 않을 때조차 최선의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마추어들이 취미 삼아 무언가에 열성을 기울인다고 해서, 그들의 판단이 전문가들의 판단을 한결같이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다.(223-224p)

 

 

게다가 이 모든 상호작용은 사람들이 잘못된 정보에 집착하게 되는 현상을 완화시키는 데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사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틀렸다는 명백한 증거가 제시되어도,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애초의 확신을 갑절로 더 단단하게 만든다. 이런 현상을 ‘역효과 현상’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현상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이 틀렸다는 증거가 분명해도, 자신이 가진 믿음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방어 노력을 한다.(235p)

 

 

전문가들이 마주하게 된 성가신 장애물은 가령 이런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뉴스의 양은 더 많은데 사람들이 아는 것은 더 없어졌다는 사실. 그런 현상이 생긴 지는 대략 25년 정도 됐을 터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문제는 점차 해결되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게 더 없어졌을 뿐 아니라, 관심도 줄고 있다. 이전에 비해서 정보는 훨씬 더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도 말이다.(246-247p)

 

 

전문가를 포함해서, 이런 종류의 실패를 두고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런 것은 사실, 실패라기보다는 과학과 학문의 필요 불가결한 과정이며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모호함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어떤 절차를 따르라고 경고 대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를 더 바란다. 하지만 과학은 과정이지 결론이 아니다. 과학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규칙에 따라 반복해서 검증하는 절차를 거친 후에 이론을 수립하는 작업이며, 그 이론은 나중에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일반인은 전문가가 절대로 틀리는 일이 없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307p)

 

 

과학 연구의 황금 기준은 실험을 수차례 되풀이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 혹은 최소한 재연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과학자와 학자들이 주석을 다는 게 바로 그런 이유다. 표절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장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ㅡ물론 분명히 그런 이유도 있지만 동료 연구자들이 자신이 실행한 방식을 따라 실험을 할 경우네,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만약 조작을 통해서 나온 결과라면 실험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같은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테고, 그러면 그런 과학 연구는 신뢰성이 떨어지거나, 심지어 조작된 연구로 여겨지게 된다.(316-317p)

 

 

미국인들의 무지를 향한 진군에서 가장 걱정스런 부분은 “지식의 결핍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의 결핍에 대한 오만한 태도다.

 

문제는 그저 우리가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점이 아니라(국립 과학 협회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아직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라), 놀랍도록 많은 수의 미국인들이 아예 그런 사실은 알 필요가 없다고 당당하게 결론 내려 왔다는 사실이다··· 반-합리주의와 무지가 우러나는 과정에서 생겨난 독성들이, 보건에서부터 세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공공 정책에 관한 토론에서 해를 끼치고 있다.

(...)

어쩌면 이런 현상을 단순히 “반-합리주의”라고 부르는 것조차 지나치게 너그러운 건지도 모른다. 사실 이것은 거의 퇴보다. 검증된 지식을 멀리하고 구전되어 온 민속 지혜와 신화로 뒷걸음질 치는 현상 말이다. 이 모든 엉터리 지식들이 이제는 광속으로 전파된다는 점이 과거와 다를 뿐이다.

지식에 대한 이해력이 곤두박질치고 의도적 무지가 증가하는 이런 현상은, 일반인들과 공공 정책 사이의 유리가 만들어 낸 악순환의 고리 중 일부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통치 받고 있는지, 혹은 그들의 경제적, 과학적, 정치적 구조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과정 전부가 점점 더 이해하기 힘들어지면서, 갈수록 많은 소외감을 느낀다. 그 복잡함과 어려움에 압도당한 사람들은 아예 교육과 참여의 기회로부터 등을 돌려버리고, 다른 것만 뒤쫓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반인들의 능력은 더 떨어지게 되고, 악순환의 고리는 더 강해지게 된다. 사람들의 이러한 도피 욕구가 다양한 여가산업의 손쉬운 먹이가 되면서, 그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평생 상상도 못했던 도구가 등장하고, 편리함이 넘쳐난다. 그 결과 미국인들은 (그리고 공정하게 말해 다른 서구인들 역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들의 방향을 검증하는 데 필요한 배움을 거부하고 있다. 거부하는 태도도 거의 어린아이 수준이 되어 버렸다. 이런 현상은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붕괴시키고 있으며, 다른 해로운 결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만들고 있다.(373-375p)

 

 

우리 가운데 정보와 지식이 가장 부족한 이들이 전문가를 가장 불신하고 있으며,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나도 하고 있지 않다는 스스로의 문제는 제쳐 둔 채, 가장 많은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390p)

 

 

즉, 투표자들이 후보가 내세우는 이념이나 정책보다는 호감도와 인격적 특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 말이다.

(...)

어떤 정치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건 간에 미국인들한테는, 지금 문제가 되는 모든 사안들에 관해서 분명한 의견이 없다. 특히 복잡하거나 모호한 주제라면 더 그렇다. 마땅히 사람들은 당파적 신호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가가 어떤 법안에 찬성하면 그 법안이 좋은 법안이라고 생각하며, 반대하면 나쁜 법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391p)

 

 

이제 마지막으로, 가장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할 차례다. 바로 서구 민주주의 체제의 국민, 특히 미국인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의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런 현실이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전문가와 일반인 간의 관계를 파괴했을 터이다. 전문가와 일반인의 관계는 ‘민주적’이지 않다. 모든 사람의 재능이나 식견의 수준이 똑같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는 늘 원한에 가득 찬 평등주의를 고집하려는 유혹을 받으며, 아무 제약을 가하지 않을 경우 그 고집은 억압적인 무지가 된다.

슬프게도, 바로 이것이 현대의 미국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가 정치적 평등이라는 조건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즉 누구나 하나의 투표권을 가지며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조건 말이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민주주의를 실제로 동등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태양 아래 거의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모든 의견이 다른 의견과 같은 수준으로 타당한 상태 말이다. 이때 감정이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만약 사람들이 백신이 해롭다고 ‘생각하거나’ 미국 예산의 절반이 해외 원조로 빠져나간다고 ‘믿는다’면 그런 생각이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비민주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행위가 된다.(396-397p)

 

 

물론 내가 말하는 감정은 사람들이 대번에 ‘나나 당신이나 뭐가 달라요’라고 말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나나 당신이나 뭐가 달라요’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진짜로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프스의 구조견으로 유명한 세인트 버나드는 장난감 개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며, 학자는 둔재에게, 일자리를 가질 만한 사람은 게으름뱅이 건달에게, 예쁜 여자는 못생긴 여자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정치 영역을 벗어난 평등 주장은 어떤 식으로든지 스스로 열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입에서만 나오는 말이다. 그 말에 들어 있는 내용은, 정확하게[한 인간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아프고 쓰리기 짝이 없는 열등감이다.

그러니 자연히 원한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 종류를 막론하고 누군가 우월함을 보이기만 하면 열등한 그들은 그 우월함을 증오하고 폄하하면서 그것이 말살되기를 바란다.(398-399p)

 

 

21세기 초기에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민주주의는, 증오하고 분노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대학생의 연약한 자아가 토크 라디오 중독자의 분노하고 상처 입은 자아와 힘겹게 겨루고 있다. 그들 모두, 자신의 관점이 아무리 극단적이거나 부족한 정보와 지식에 기초한 것일지라도 다른 모든 사람들 의견과 똑같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한다. 전문가들은 “우리 국민”을 사실상 억압하고 있는 많은 집단들 가운데 하나인, 엘리트주의자 집단으로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고, “우리 국민”이라는 말은 투표자들에 의해서 대부분 “나”를 뜻하는 말로 아무 곳에서나 사용되고 있다. 전문가의 충고나, 일반인들이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사람ㅡ즉 자신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ㅡ에 의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숙고라면, 그 어떤 것도 거부당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절대 이런 식으로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400p)

 

 

ㅡ 톰 니콜스, <전문가와 강적들> 中, 오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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