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5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짝꿍이 자꾸 아이스케키를 하고 시비를 건다고 일렀을 때, 담임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위로 언니가, 아래로 터울이 꽤 지는 남동생이 있던 정희는 음식이든 용돈이든 학원비든 동생 다음 차지인 게 서럽다고 말했다. 이른 아침 등교하던 현주는 승용차에 탄 채 길을 묻던 남자가 하의를 다 벗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수능이 끝난 기념으로 친구들과 함께 기차 여행을 가던 중에는 객차 안을 돌아다니던 남자가 통로 쪽에 앉아 있던 지선이의 가슴을 만졌다. 여고 앞길과 뒷산에 출몰하는 ‘바바리맨’을 본 친구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공부를 좀 하는 친구는 모두 부모에게 여자 직업으로는 교사가 최고이니 교대에 가라는 말을 들었고, 대학에 가서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가 헤어진 경미는 학과 사람들에게 무수한 뒷말을 들었다. 정화는 상사에게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다니 된장녀라는 소리를 들었고, 주영은 회식 자리에서 부장과 블루스를 춰야 했다. 민경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부모에게 받은 것은 임신에 도움이 된다는 보약이었고, 주원은 아이를 낳고 나니 손목이 시큰거리고 뼈가 시려 견딜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맞벌이를 하며 정신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세영은 어디 가서 ‘맘충’이라는 말을 들을까 봐 겁이 나 죽겠다고 말했다.(32-33P)

 

 

‘지켜주겠다’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여성 선별 범죄가 분명한 사건이 잇따르는데도 ‘묻지마 범죄’라는 표현을 관성적으로 사용하며 피해자로서 ‘여성’의 존재를 지우는 경찰과 언론, 그리고 이에 기꺼이 동조하며 한국 사회에 팽배한 여성혐오를 방관하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는 ‘남의 일’에 불과할 것이다. ‘모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지 말라’는 말은 언제나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혹은 이미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공포와 분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리베카 솔닛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인용한 지네 추라는 여성의 트윗은 이 문제를 명료하게 요약한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68P)

 

 

스스로 건전한 상식인이라고 믿는 호모포비아만큼 끈질기고 말이 안 통하는 상대는 없을 것이다.(104P)

 

 

<파리의 연인>의 그 유명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한기주는 자기가 데려간 모임에서 모욕당하고 있는 강태영(김정은 분)을 질질 끌고 나오며 “너 바보야? 왜 말을 못 해? 손 치우란 얘기도 못 해?”라며 화를 내면서도 정작 자신의 손은 치우지 않는다. 그리고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 하냐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름으로써 ‘애정’을 표현하다가 격정에 못 이겨 기습 키스를 퍼붓는데,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거지? 불쾌하고 불안해서 사랑은커녕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 남자들인데.(115P)

 

 

“보고 싶어요.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라는 메시지만 남기고 찾아오는 남자, 사랑하는 여자의 집 앞 현관이나 계단에 밤새 앉아 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남자. 상상만 해도 너무 설레긴 개뿔, 어떻게 피해야 할지 무서울 뿐이다. 여성이 자신만의 안전하고 사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욕구지만 너무나 쉽게 침해받는 권리기도 하다. 초대받지 않은 이가 쳐들어오는 것도, 주변을 서성이는 것도, 지켜보는 것도 스트레스며 공포다. 자신이 순정남이라 믿었을 것 같은 많은 남주인공들과, MBC <운빨로맨스>에서 여성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고 현관문을 닫지 못하도록 버텼던 두 남자는 이를 알고 있을까. “지금 우리가 데이트폭력이라 부르는 것들은 과거 ‘치정 폭력’, ‘치정 살인’의 현대화된 언어이고, ‘애틋한 로맨스’라 믿었던 ‘따라다니기’, ‘기다리기’등은 이제 스토킹이라 부른다.”(119-120p)

 

 

“지금의 걸 그룹은 아이돌이 아니다. 우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은 동경받기 위해 판타지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웃어야 한다. 존중받지 않는 것이, 지금 이 극한 직업의 본질이자 그들의 역할이 되어버렸다”(132p)

 

 

한국 사회에서 20대 여성으로 살아가다 보면 내게 성폭력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다. 정작 끔찍하고 분노스러운 것은 내가 겪은 일이 교사라는 이유로 성폭력이라 호명되지 않고, 교사라는 이유로 내가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피해자라는 위치보다 교사라는 것을 더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요받는 것. 어떤 사람이 교실에서 내게 야동을 보여주며 ‘선생님, 섹스해 봤어요?’라고 물어본다 하더라도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교육자로서 왜 이런 행동이 잘못이고 바람직한 성 관념은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친절히 설명해야 하는 것이 나의 직무이자 의무라고 이 사회가 규정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학교라는 공간이 절대로 날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순간순간 바늘로 찌르듯 인지되는 것이 절망스러운 것이다.(202p)

 

 

“‘일베 문화에 물든 요즘 초딩들’이야기가 나오면 여학생들은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일베 문화를 체화한 학생들은 대부분 남학생들이던데 그 사이에서 같이 살고 있는 여학생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수십 명의 초·중·고 여학생들이 그에게 긴 답장을 보내왔다. ‘김치녀’나 ‘걸레’, ‘메갈년’이라는 욕설을 듣고 외모 평가는 물론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하는 일도 흔하다는 토로가 끝없이 이어졌다. 제발 누구라도 좀 물어봐 주기를 바랐던 것처럼 절박한 목소리들 사이의 한 문장을 잊지 못한다. “좀 살려주세요.”(203-204p)

 

 

너무 지쳤지만 분노와 우울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애써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문득 눈에 띈 웹툰을 보던 중 한 대목에 시선이 머물렀다.

 

모니야, 용기는 두려운 마음 안에 있어. 네가 그 두려운 마음 안에 있는 용기를 힘차게 불러내면 돼. 그리고 말이야······ 네가 남을 위해 용기를 내면,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용기도 세상 밖으로 뛰쳐나올 수 있어.

 

다른 때였다면 무심히 지나쳤을지도 모를 이 말이 그 순간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용기는 두려운 마음속에 있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용기가 아니라, 그 두려운 마음 안에서 용기를 불러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일 수 있다는 것. 나의 두려움만이 아니라 타인의 두려움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위해 용기를 낼 수도 있고,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나는 다시 용기를 내기로 했다.(206-207p)

 

 

그러나 여성 배우가 ‘촬영장의 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들이 남성 동료들과 동등한 존재가 아님을 의미한다. 이들은 ‘예쁘고 상냥한 여배우’로서의 감정 노동을 암묵적으로 요구받으며 이를 기꺼이 수행하면 칭찬받고, 그렇지 않으면 ‘까칠하고 거만한 여배우’라는 또 다른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비난받는다. 담배를 피울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부당한 상황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낼 때조차 여배우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직접 대응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다.(216p)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한다는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가시밭길에 들어서는 일과 같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TV에서, 신문에서, SNS에서 마주하는 혐오와 차별과 폭력에 맞서 ‘흥’을 깨뜨려야 한다. 어제까지의 나를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은 물론, 지금 이 순간의 나조차 믿을 수 없어 불안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만 이렇게 생각하나?’하는 외로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세상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일상을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고통스럽고 피로한 일이다. 하지만 돌아 나갈 마음은 없다.(222-223P)

 

 

 

 

ㅡ 최지은, <괜찮지 않습니다> 中, 알에이치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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