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4

 

 

내가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남아 있는 나날’을 즐거이 읽었던 기억으로 기대감이 가득했는데 쉽게 읽히지 않았다. 소설의 문제라기보다는 무릇 판타지라고 했을 때 독자가 기대할법한 거의 모든 것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하긴 ‘나를 보내지 마’도 겉으로는 SF라는 장르를 두르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계속 읽다보니 또 나름 괜찮아서 후반부는 몰입해서 읽었다. 초반부터 강하게 암시하는데, 기억과 망각에 대한 소설이다. 이때의 기억이란 인간의 사랑에 대한 협소한 기억만 일컫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의 유대가 아주 강하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이 있으면 저는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을 제 앞에 보여달라고 하지요. 한 사람에게 물어본 다음, 다른 사람에게 같은 걸 묻습니다. 두 사람은 따로따로 말해야 해요. 그러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 참된 모습이 곧 드러나요.”

“어렵지 않아요?” 비어트리스가 물었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 정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안다는 거 말이에요. 겉으로 보이는 것에 쉽게 속을 수 있어요.”

“맞습니다, 부인. 하지만 우리 뱃사공들은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속임수를 꿰뚫어 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요. 게다가 가장 소중한 기억을 이야기할 때에는 진실을 숨기는 게 힘들지요. 부부는 사랑으로 이어져 있다고 주장하는데도 우리 뱃사공의 눈에는 분노나 화, 심지어는 증오가 보일 때도 있어요. 아니면 아무것도 없이 황량하기만 한 경우도 있고요. 더러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보여요. 오랫동안 이어져온 지속적인 사랑, 그런 걸 보는 경우는 정말 드물지요. 그런 사랑을 보게 되면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두 사람을 함께 배에 태워 갑니다.”(68-69p)

 

 

“게다가 내가 기억을 하든 잊어버리든 내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감정은 늘 똑같이 그 자리에 있을 거예요. 당신은 늘 같은 감정 아닌가요, 공주?”

“나도 그래요, 액슬. 하지만 지금 다시 드는 생각은요, 오늘 우리가 마음속으로 느끼는 감정이 마치 비를 머금은 잎에서 떨어지는 이 빗방울과 같은 건 아닐까 하는 거예요, 사실 하늘은 오래전에 비가 그쳤는데 말이에요. 우리의 기억이 사라지면 우리의 사랑도 점점 빛이 바래져 완전히 사라져버릴 뿐, 거기에 다른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

“그 낯선 여자는 내게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했어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우리가 함께 나눈 일을 기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떠날 때 그 뱃사공은 내가 예상하고 두려워했던 바로 그 대답을 했어요. 우리에게 어떤 기회가 있을까요, 액슬, 지금 이 상태에서요? 그와 같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추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요?”(71-72p)

 

 

“그런데 부인, 당신은 이 안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확신하나요? 우리가 알지 못하게 감춰져 있는 편이 더 좋은 것도 있지 않을까요?”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신부님. 액슬과 저는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들을 되찾고 싶어요. 그런 순간들을 빼앗긴다는 건 밤중에 도둑이 들어와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아 간 것과 같아요.”

“하지만 안개는 좋은 기억뿐만 아니라 나쁜 기억까지 모두 덮고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부인?”

“우리에게 나쁜 기억도 되살아나겠지요. 그 기억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로 몸을 떨기도 할 거고요. 그래도 그건 우리가 함께했던 삶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럼, 나쁜 기억이 두렵지 않은가요, 부인?”

“뭐가 두려워요, 신부님? 오늘 액슬과 제가 각자 마음속으로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아무리 이 안개가 위험을 숨기고 있더라도 기억을 되찾는 길이 우리에게는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건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이전까지 아무리 우여곡절이 많았더라도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건, 어린아이라 해도 알 거예요. 액슬과 전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더라도 함께 기억할 거예요. 그건 우리에게 소중한 거니까요.”(243-235p)

 

 

“단순한 거예요, 공주. 케리그가 정말로 죽고 이 안개가 사라지게 되면 말이오. 그래서 기억들이 돌아오고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던 기억들도 생각나면 말이오. 혹은 한때 내가 저질렀던 어두운 소행들이 기억나서, 당신이 날 다시 보게 되고,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이 더 이상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말이오. 이것만은 약속해줘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요. 안개 속에서 깨어나 기억이 돌아오더라도 결국 서로를 멀리하게 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오? 약속할 거죠, 공주? 안개가 사라지고 나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게 느끼는 그 마음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겠다고 약속해요.”(383p)

 

 

“잘못된 일이 사람들에게 그냥 잊힌 채 벌 받지 않기를 바라는 신은 어떤 신인가요?”(426p)

 

 

“아내가 그 일의 시작을 자기 탓이라고 했다면 그다음에 일어난 많은 부분은 내 잘못으로 돌려야 해요. 사실 짧은 기간이지만 아내가 날 배신한 적이 있었지요. 내가 한 어떤 행동 때문에 아내가 다른 사람의 품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내가 어떤 말 혹은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요? 지금은 다 아득하게 지난 일이에요. 새가 저 멀리 날아가 하늘의 한 점으로 보이는 것처럼요. 하지만 아들은 이 쓰라린 일을 지켜본 목격자였어요. 달콤한 말로 속이기에는 나이가 들었고 그렇다고 사람 마음의 갖가지 이상한 점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어요.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떠났고, 아내와 내가 다시 행복하게 재결합했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지요.”

(...)

“나는 용서를 이야기하고 실천하면서도, 복수를 갈망하는 마음속 작은 방에 용서의 마음을 오랫동안 꽁꽁 가둬두었던 거지요. 아내에게, 그리고 내 아들에게 옹졸하고 증오에 찬 행동을 했던 거요.”(466-467p)

 

 

 

ㅡ 가즈오 이시구로, <파묻힌 거인> 中,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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