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6

 

 

오르한 파묵의 책은 처음인데 되게 재밌는데? 특히 앞부분 절반가량은 단숨에 읽힌다.

 

 

 

책 서두의 헌사가 내 개인적으로 어떤 중요성이 있는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게 이 시대의 병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같은 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것이다.(16p)

 

 

후에 나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때 그 한순간의 선장의 비겁함이 내 인생 전부를 바꿔놓았다고.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 당시 선장이 그처럼 겁을 먹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 인생은 여전히 이렇게 바뀌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이 인생이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우연의 연속일 따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 사람들에게도 과거를 되돌아보다가,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사건들이 사실은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18p)

 

 

그 후 삼 년간이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매일매일이, 한 달 두 달이 하루처럼 똑같았고, 계절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겪어 왔던 계절들의 지겹고도 견디기 힘든 반복이었다. 우리는 날마다 한 치도 틀리지 않고 되풀이 되는 것들을 고통스럽고 절망적으로 바라보면서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재앙이 오기를 막연히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가끔 궁정으로 불려가 허울 좋은 예언을 기대하는 이들을 위해 해몽을 해주었고, 목요일 오후면 여전히 사원의 시계실에서 친구들과 모여 과학 이야기를 했으며, 아침이면 여전히 예전처럼 규칙적인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고 종아리를 때렸다. 종종 집으로 놀러와 혼사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을 그전만큼 단호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무시했고, 여자들과 농을 하기 위해 여전히 듣기 싫은 음악도 들어야 했으며,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증오를 참지 못할 때면 여전히 숨을 가누지 못하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또한 침대 위에 누워서도 손가락은 가만히 두지를 못하고 사방에 쌓인 필사본과 책들을 신경질적으로 매만졌으며, 그러다가 천장만 쳐다보며 마냥 시간을 보냈다.

(...)

그는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진을 빼놓는 반복적인 일상의 권태를 깨버릴 어떤 재앙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걱정이 됐던 것은 ‘과학’이라는 것을 완고하게 추구할 만한 끈기와 신념이 이미 그에게서 소진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그를 매혹시키지 못했다.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도 거기에 일주일 이상 빠져들지 않았으며, 도중에 바보들을 상기해내고 모든 것을 잊으려고만 했다.

‘그들을 위해 지금까지 생각한 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들을 위해 이 정도까지 고민할 가치가 있을까? 내가 이렇게 화를 낼 가치가 있을까?’

아마도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법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정열과 욕구를 과학 연구에 집중시킬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바로 그때부터 그는 자기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믿기 시작했다.(90-92p)

 

 

 

ㅡ 오르한 파묵, <하얀 성>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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