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13

 


so-so.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48p)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59-60p)

 

 

점이나 혈액형에 관한 이야기는 싫어한다. 별자리와 전생, 사후세계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런 사고방식은 당장 눈앞에 있는 어찌하기 힘든 현실, 인간관계, 그리고 나 자신을 외면하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79p)

 

 

딸기라면, 유치원 때 가장 사이가 좋았던 이발소의 앗짱네 놀러가, 처음으로 연유를 넣은 우유에 담가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 이렇게 하는구나’하고 배우면서 숟가락으로 그 딸기를 짓이겨 모두 먹어치우고서, 남은 분홍빛 우유를 마셨다. 충격적인 맛이었다.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재빨리 엄마에게 보고했지만, 앗짱의 엄마와 사이가 나빴던 우리 엄마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딸기는 딸기의 단맛만으로 그 상태 그대로 먹는 게 가장 맛있는 거야”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곧 고레에다 집안의 찬장에도 바닥이 평평한 숟가락이 준비되었다. 어째서인지 연유가 아닌 설탕을 우유에 섞어 먹는 방법으로 정착됐지만, 나에게는 어떤 케이크보다도 그 딸기우유가 줄곧 최고의 간식이었다.(112-114p)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결함은 문제 삼지 않고, 상대를 이해력 없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이러한 품위 없는 태도가 부시의 본질이라면, 설사 부시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쪽은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진정한 의미의 ‘반 부시’가 아닐까.(160p)

 

 

사실 내가 봤을 때 <화씨 9/11>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뜻에 힘입었대도, 찍기 전부터 결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련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공격하는 것 같은 작품을 만들어, 잠깐 동안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고작 제작자의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짜 적은, 이러한 존재를 허용하고 지지한 이 나라의 6할에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고이즈미적인 것’이고, 그 병소를 공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고이즈미)만을 찔러 짜낸대도 병세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161p)

 

 

 

ㅡ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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