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7/19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다. 마지막이라고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할 필요도 없고 특별하지도 않다. 그냥 필립 로스 소설이다. 얄짤없이 드라이한 묘사로 양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삶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우리 모두가 환경의 힘 앞에 이렇게 무력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여기 어디에 하느님이 개입하고 있단 말인가? 하느님은 왜 한 사람은 손에 라이플을 쥐여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 내려보내고 다른 사람은 인디언 힐 식당 로지에서 마카로니와 치즈가 담긴 접시 앞에 앉아 있게 하는가? 하느님은 왜 위퀘이크의 한 아이는 여름 동안 폴리오에 시달리는 뉴어크에 놓아두고 다른 아이는 포코노 산맥의 멋진 피난처에 데려다놓는가? 이전에는 부지런하게 열심히 일하는 것에서 자신의 모...든 문제의 해법을 찾았던 사람에게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 왜 지금처럼 일어나고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157p)

하느님 이야기를 하자면, 인디언 힐 같은 천국에서 하느님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1944년 여름 뉴어크에서는―혹은 유럽이나 태평양에서는―그렇지 않았다.(179p)

사람의 운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누구의 인생이든 우연이며, 수태부터 시작하여 우연―예기치 않은 것의 압제―이 전부다. 나는 캔터 선생님이 자신의 하느님이라 부르던 존재를 비난했을 때 그가 정말로 비난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243p)

“그 친구는 앵글우드 학군에서 일자리를 얻었어. 부인하고 애들을 데리고 그리고 올라갔지. 아니, 나는 그 친구를 만나지 않네.” 그러더니 그는 침묵으로 빠져들었고, 그가 자신에게 없는 것은 그냥 없이 산다고 금욕적으로 주장했음에도 그렇게 많은 것을 잃은 것에 그가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으며, 이십칠 년이 지났음에도 일어났거나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여전히 궁금해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 수많은 일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 더없이 분명해졌다―그 가운데는 자신이 지금쯤 위퀘이크 고등학교 체육 프로그램의 책임자가 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271p)

그러나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만큼 구원하기 힘든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자신만의 상황 감각을 키워왔기 때문에―또 간절하게 갖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내 힘으로는 그가 자기 삶의 끔찍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을 몰아낼 수도 없고 그와 그 사건의 관계를 바꾸어놓을 수도 없었다. 버키는 똑똑한 사람도 아니었고―똑똑했다면 아이들에게 체육을 가르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결코 태평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대체로 재미가 없는 사람이었으며, 의사 표현은 정확했지만 재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평생 풍자나 아이러니가 섞인 말은 해본 적도 없었고, 우스개나 농담을 던지지도 않았다―대신 가혹한 의무감에 시달리면서도 정신의 힘은 거의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 시간이 갈수록 그의 불행을 강화하고 치명적으로 확대하는 이야기에 아주 심각한 의미를 부여해 큰 대가를 치렀다. 챈슬러 놀이터와 인디언 힐 양쪽에 초래된 대재난은 그의 눈에 자연의 악의에 찬 부조리가 아니라 그 자신이 저지른 큰 범죄로 보였고,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한때 소유했던 모든 것을 내놓고 인생을 망쳤다. 버키 같은 사람의 죄책감은 남이 보기에는 터무니없지만, 사실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구제 할 수 없다.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그가 안에 품은 이상에는 이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절대 모른다. 그는 절대 자신의 한계를 믿지 않는데, 다른 사람의 고통에 체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을 천성적으로 짊어지고 있어, 자신에게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반드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구인 남편을 얻는 것을 막는 데서 가장 큰 승리감을 맛보며,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을 부인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 된다.(273~275p)


ㅡ 필립 로스, <네메시스>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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