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6

책이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느낌. 중복이 많음. 책을 읽으며 편집에 대한 아쉬움이 든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 책은 그렇게 느낌.

 

 

사전적 의미로 혐오는 매우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국어에서는 혐오는 혐오시설’, ‘혐오식품처럼 시설이나 음식을 수식하는 말로 주로 쓰여왔다. 혐오표현은 헤이트 스피치를 번역한 말인데, 영어에서 헤이트도 극도의 싫음, 역겨움, 적대감을 뜻한다. 헤이트나 혐오 모두 상당히 강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혐오표현에서의 혐오는 이러한 일상적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여기서 혐오는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뜻한다.(24p)

 

 

그러니까 동성애 반대라는 말이 실제로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다소 달랐던 것이다. 동성애 차별이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 반대는 결코 사소한 표현일 수 없다. 실제로 소수자 당사자와 제3 자의 입장 차이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여성혐오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불평등의 현실이 심각하다고 여길수록 여성혐오의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간주된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소수자들이 처해 있는 불평등의 맥락 때문에 혐오표현은 그 표현 수위와 상관없이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떤 혐오표현은 특별히 대응하기도 구차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두면 고착화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김치녀, 김여사, 개념녀 같은 차별적인 언사들이 식사·술 자리에서 농담식으로 난무할 때 이를 하나하나 따지고 저항하는 것은 쉬울 일이 아니다. 문제 제기를 했다가는 너무 예민하다”, “분위기를 깬다”, “농담인데 왜 혼자 유난이냐등등의 반격을 받을 가능성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자들은 침묵을 선택하곤 한다. 웃는 척하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기도 한다. 이때 침묵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강요된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러한 침묵이 지속되다 보면 점차 그런 차별적 언사들이 정당화되고 고착화된다. 사실로 굳어지는 것이다.(40-41p)

 

 

혐오표현에 관하여 대중강연 하다 보면 남혐(남성혐오)도 문제 아닌가’, ‘개독도 혐오표현 아닌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핵심은 남혐이나 개독이라는 표현이 소수자 혐오의 경우처럼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남성이나 기독교도와 같은 다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은 성립하기 어렵다. 소수자들처럼 차별받아온 과거와 차별받고 있는 현재와 차별받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라는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표현은 대개의 경우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표현과 같은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남학생들은 매일 스마트폰으로 스포츠카나 구경한다. 그래서 불행한 거다라고 말하거나 비장애인에게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 말고 집에 처박혀 있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남성이나 비장애인에게 위협이 된다거나 차별을 조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 백인들에게 덩치만 크고 미련한 백곰 같은 놈들아라고 외쳐봐야 백인들의 정신적 고통을 야기하거나 백인=미련곰탱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화시켜 백인 차별을 조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인 사장에게 한국 사람들은 사장님처럼 다 게으른 모양이네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한국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효과를 낳을 리는 없다. 이성애자가 이성을 사랑하는 건 당신 자유인데, 내 눈에 띄지는 마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이성애자의 사랑이 위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혐오표현이라고 이슈화할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반면 똑같은 표현이 소수자를 향할 때는 사회적 효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표현 자체가 차별을 조장하고, 상처를 주고, 배제와 고립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혐오표현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인 것이다.(43-44p)

 

 

무슬림이 일상적인 편견, 혐오, 차별에 노출되어 있는 사회에서 무슬림 혐오표현을 농담처럼 받아넘길 수 없다. 혐오표현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실제로 위협하는 현실 그 자체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차도르를 두르고 나갈까 고민이 된다. 거리에서 조금이라도 묘한 시선을 받게 되면 배제와 차별의 눈빛 같아 두렵다. 회사에서 삼삼오오 쑥덕거리는 모습을 목격하면 혹시 자신을 험담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기도를 하러 나갈 때도 무슬림 휴일에 휴가를 내는 것도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무슬림 혐오가 난무하는 인터넷을 보다 보면 차도르를 두르고 나갔다가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45p)

 

 

하지만 혐오표현의 문제에서 저자의 의도는(그를 형사처벌할 것이 아니라면)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쁜 효과를 낳고 있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중국 동포들에게 영화를 영화로 봐달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그들이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게 된 사정을 헤아려야 한다. 영화와 같은 예술에서 조롱이나 희화화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집단이 사회적 강자나 권력자가 아닌 소수자일 때는 얘기가 다르다. 그 부정적 효과를 충분히 고려하고 성찰하는 것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윤리다.

다만 이런 문제에 영화 상영 허용 또는 금지와 같은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의 지형을 협소화시킬 우려가 있다. 표현과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서 손쉽게 규제카드를 꺼내든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 있다.

(...)

무엇보다 우리 영화가 그동안 소수자를 다뤄온 방식이 너무 편의적이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비하 의도가 없었음을 항변할 것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는 부정적 효과에 너무 무심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88-89p)

 

 

그렇다면 왜 증오범죄를 특별히 이슈화하는 것일까? 혐오표현과는 달리 증오범죄는 증오범죄로 분류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처벌하는 범죄인데도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증오범죄의 해악이 중대하기 때문이다. 증오범죄는 피해자 집단에게 너희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피해자 집단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며, 차별과 배제를 공공연하게 예고하는 것이다. 예컨대 성소수자 환영 현수막을 훼손한 것은 이곳은 성소수자가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렇게 직접 할 수도 있겠지만 현수막 훼손이라는 범죄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증오범죄가 발생하면 그 피해자들은 집단적으로피해를 공유한다. 자신도 언제든 피해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극심한 공포감을 느끼고 위축된다. 혐오표현이나 증오범죄의 파급력은 상당히 유사하다.(96p)

 

 

한국 사회에도 미국식 접근을 선호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분명히 확인해두어야 할 것은, 미국식 접근은 대통령이 수시로 차별금지에 대한 입장을 확인하고, 차별금지법이 각종 차별을 실질적으로 규제하고, 대학과 기업이 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표현에 관해서는 어떠한 내용 규제도 일관되게 불허하는 미국 사회의 맥락에서나 유효하다는 점이다.(141p)

 

 

혐오표현이 금지되면 사회의 담론이 합법 표현과 불법 표현으로 이분화되어 그동안 도덕·비도덕, 사회적·반사회적 등 다양한 가치 판단에 의해 논의되던 것들이 합법·불법이라는 논점으로 급격하게 빨려 들어갈 수 있다. 이전에는 반사회적이라고 비판받던 것들이 합법이라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의 엉뚱한 정당화 기제를 갖게 될 수도 있다. 형법의 판단은 일도양단이다. 유죄 아니면 무죄다. 이론상 무죄는 국가형벌권을 동원할 문제가 아님이 소극적으로 표명된 것에 불과하지만 현실에서의 무죄는 문제없음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형사범죄화로 인해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에너지가 처벌에만 집중된다는 문제도 있다. ‘합법이라고 인정하면 사회는 그것을 문제없음으로 받아들이고 문제 해결을 위한 추가적인 노력을 회피하곤 한다. 반면, ‘불법으로 판결하여 처벌에 성공하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착시현상이 생기고 국가는 자기 역할을 다했다는 면죄부를 얻어 더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등한시할 수 있다.

법이 발화자 처벌에만 머무른다는 것도 문제다. 혐오표현의 원인에는 복잡한 정치·사회·경제적 배경이 깔려 있어서 이런 것들을 도외시한 채 혐오표현의 발화자만 처벌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범죄를 낳은 것은 사회인데, 처벌받는 것은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된다는 문제다. 금지와 처벌로 인해 겉으로는 법규제가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수면 아래에 있는 혐오와 차별은 언제든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159-160p)

 

 

형사 규제, 민사 규제, 차별시정은 모두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방식인 반면 형성적formative, 촉진적facilitative, 적극적affirmative, 사전 예방적인 방식의 규제도 있다. 혐오표현의 금지, 처벌을 통한 문제 해결이 사후적·소극적·부정적negative인 조치라고 한다면, 형성적인 규제는 혐오표현이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여건을 만들어가는긍정적positive인 조치를 말한다. 혐오표현 전단지 배포자들을 형사처벌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한 전단지가 학교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한 여건을 만들기 위해 교사를 훈련시키고, 교육과정을 제공하고, 관련 수업을 진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형성적 규제다.(174-175p)

 

 

동성애를 혐오한다거나 외국인 노동자를 쫓아내자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는 사람이 세금 폭탄이나 일자리 문제가 개입되면 최소한의 윤리적인 자기 검증을 중단하게 된다. 사회경제적 위기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난제일수록 엉뚱하게도 만만한 상대에게 손쉬운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혐오의 확산을 그들 나라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연결시키는 분석이 많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이 경제 위기와 함께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치즘이 중간계층의 위기에서 싹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226p)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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