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9
책을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지점은 내용 자체의 난해함도 있겠지만 사용하는 용어의 생경함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도 익숙함의 문제이긴 하다. 특정한 용어나 단어를 낯설게 느끼는 이유는 그만큼 관련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반증일 테니.
그러나 의료전문가들이 이처럼 광범위한 영역에 개입할 권한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할 수 없는데도 의학이 관할하는 영역이 계속 확장되고 의사들이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이익과 불이익, 특권과 배제를 둘 다 수여하는 사회적 기능에 문지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의료화의 ‘정의하는 능력’은 실제로 그 대상자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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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이 진단명을 얻지 못하는 경우, 즉 아프다는 본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대해 “의학적 승인”을 받지 못할 경우 아픈 사람은 아픈 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지원을 끊길 위험에 처한다. “보험금 청구, 보조금, 복지 수당과 장애 수당 모두가 공식적인 진단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병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프다고 거짓말하면서 제대로 일도 안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는 인간으로 낙인찍혀 결국 “가족, 친구로부터 버림받는”일이 드물지 않은 것이다.(25p)
의학이 도덕적 가치판단과 무관하다는 전제가 의학이 사회의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가린다는 점을 페미니스트 의료사회학자 및 과학자들은 꾸준히 지적해왔다.
더 중요한 것은 병리화의 작동 방식이다. 강제불임시술을 받았던 정신장애인과 한센인, 교정치료라는 이름의 고문을 받았던 자폐인과 정신장애인과 퀴어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 병리화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아파서 병을 치료하는 문제가 아니다. 병리화는 정상성을 생산하고 강화하는 기제다. 생물학적 다양성을 정상/병리의 차등적인 위계질서 안에 촘촘하게 줄 세워 배치하면서 ‘정상적인 몸’을 구성하는 외부로서 병리적인 몸을 생산하는 것이다. 특정 몸이 정상적인 몸의 위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반대되는 비정상으로서 병리화된 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상성과 장애는 동전의 양면이다.(30p)
정상성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그냥 우리도 ‘정상인’에 끼워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페미니즘이 기울어진 운동장 자체를 문제시하듯, 퀴어 장애 정치는 인간, 인간의 몸, 인간의 정신, 사회관계 모두를 정의하고 해석하고 재현하는 그 모든 방식에 특정 몸·정신·인간만 ‘정상’으로 인식/인정하고 그 외의 것들은 열등하고 일탈적이고 병리적인 것으로 배제하는 위계가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음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32p)
여자아이는 얌전하고 나대지 않고 귀여운 게 최고라는 편견, 성폭력의 위험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편견, 여성의 성욕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보고 여성의 성욕 표출을 문란하고 사회질서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는 편견, 아동과 여성과 장애인을 독립적인 인간 존재가 아니라 부모나 보호자에게 귀속되는 물건으로 보는 편견, 장애인은 무성적인 존재이고 무성적인 존재여야 하니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편견, 이 모든 편견이 총체적으로 결합하여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41-42p)
정체성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진정성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유성애/무성애를 비롯해 남/여, 이성애/동성애 등 우리의 성적 영역을 직조하는 수많은 이분법에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실존을 설명하기에 입수 가능한 언어가 턱없이 부족하고, 주어진 문법은 이러한 삶과 실존에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현재의 경직된 이분법적인 정체성 정의가 자신에게 꼭 맞지 않는 사람들은 부족한 언어에 자신을 끼워 맞추거나 다른 언어와 문법을 발굴해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놓여 있다. 이는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불변이라고 전제하는 진정성 서사를 교란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더 광범위하게 열어놓는다.(62p)
트랜스젠더 혹은 mtf/트랜스여성이 인공물이라는 인식은 트랜스젠더가 성전환 수술을 통해 몸의 형태를 바꾸고 젠더화된 외형을 갖춘다는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이해는 인공물인 트랜스젠더퀴어가 아닌 여성은 진짜 여성, 자연스러운 여성이라는 이항 대립 구도를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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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바로 이런 본질주의를 문제 삼으며 등장했다. 그렇기에 여성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고 가부장제가 주장하는 그런 여성의 본질적 속성, 본질적 역할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질문하는 데에선 논쟁적이었다.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는 당연한 본질이라고 생각했으며 단지 사회적 성역할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이었다. 트랜스는 인공물이라는 언설은 바로 이러한 여성 범주를 질문하지 않는 흐름에 토대를 둔다.(84-85p)
...병에 대한 낙인과 장애에 대한 낙인이 결이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일례로 가시적인 장애인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편견에 둘러싸여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고 친절을 가장한 간섭에 시달린다면, 아픈 사람들은 기본적인 도움조차 받지 못하고 건강한 비장애인의 기준에 맞춰 노동할 것을 강요당하며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꾀병 부린다는 비난을 듣는다. 이 경우 장애인과 아픈 사람 둘 다 결국엔 쓸모없는 존재라는 낙인이 찍히지만, 전자는 비장애인과의 차이가 과도하게 부각되어 차별의 근거로 동원되는 반면 후자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올 만큼 아파도 이 아픔이 차이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낙인으로 인한 경험이 다르다.(128p)
그러므로 아픈 사람을 정체성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저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별개의 제3항으로서 범주를 하나 늘리는 일이 아니다. 아픈 사람이 나을 의지가 없거나 아픔으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 병에 안주하는 나약하고 교활한 인간으로 쉽게 매도당하는 데에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엄격한 분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아픈 사람들은 그 이분법의 경계를 넘나들거나 경계지대에 상주함으로써 그 경계 자체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구성적 허구라는 것을 입증하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앞 절에서 이야기했듯 주류 사회는 물론 주유 장애학계에서도 장애인은 치료될 수 없고 의지로 극복 못하는 돌이킬 수 없는 차이인 반면 아픈 사람은 치료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나을 의지가 중요한 일시적인 위치라고 구분 지을 때, 이 구분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분법적 분리를 공고히 하여 비장애인의 주체 위치를 안전하게 담보하는 데 이바지할 위험이 있다. 자신이 언제든 병에 전염될 수 있고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이 공포를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장애인은 영원히 비장애인과는 다른 존재여야 하고, 경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아픈 사람은 두 범주 중 어느 한쪽으로 치워져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어떤 사회적인 강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픈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그만큼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를 보여주는 동시에, ‘아픈 사람’은 장애인/비장애인 이분법적 분리 체계에서 쫓겨난 비체이자 그 체계 자체를 구성하는 외부로서 체계의 내적 불안정성을 폭로하고 전복시킬 잠재력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137-138p)
아픈 사람 정체성에 대한 사유는 인식론적 전환과 광범위한 사회적 투쟁을 요구한다. 이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이 건강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기에, ‘아픈 사람 정체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니 요즘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다고 유난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바로 그것이 아픈 사람을 정체성을 호명함으로써 노리는 효과이기도 하다. ‘요즘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순간, 이 사회가 기준 삼는 건강한 비장애인이라는 이상이 강제적인 허구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아픈 사람 정체성은 이 사회가 건강/비-건강의 가치 위계를 자연스러운 진리이자 모두가 따라야 하는 정언명령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상 그 이면에서는 그러한 가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가혹하리만큼 배출하고 있다는 점을 폭로한다. 또한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들 구조의 문제점을 사무치게 몸에 새기고 있음에도 이 사회가 그것을 개개인이 알아서 챙겨야 할 개인 건강 문제로 환원하게끔 조장함으로써 권력구조로 인한 피해를 개인에게 전가하고 그로써 이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권력구조를 영속시키는 방식을 폭로한다. 따라서 아픈 사람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인정은 단지 개인 관계에서 이뤄지는 협상과 배려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오직 노동 생산성으로만 평가하며 사람을 쓰고 버리는 소모품 취급하는 자본주의 체계와, 건강/비-건강을 선/악의 이분법과 쓸모 있음/쓸모 없음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도덕적 가치체계의 공모에 맞서 싸우는 거대한 투쟁을 필요로 한다.(149p)
범주는 한 개인이 살아온 삶의 극히 일부만 포착할 수 있으며 그 일부를 의미 있는 것으로, 가장 정치적이고 논쟁적 영역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한 개인의 범주 인식을 통해 그 개인이 이 사회의 적법하거나 위법하거나 무법한 구성원인지를 파악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그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위치를 구성하도록 한다. 이것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 장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폭로하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범주를 아는 것은 개인의 삶 전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겪은 삶의 극히 일부만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고 그 경험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의미화되는지 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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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기가 마련되지 않고 한 인간의 많은 삶의 양식 중 일부를 두고 그것이 인간 그 자체, 존재 그 자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폭력으로 작동할 것이고 혐오를 생산하는 중요한 기재가 될 것이며 그 사람을 이 사회에서 추방하고 삭제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175-176p)
죽음을 어떤 식으로 사유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르게 구성된다. 죽음을 범주의 근거로 사용할 것이냐 삶을 알아가는 자리로 사유할 것이냐에 따라 죽음, 그리하여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형태로 변한다. 만약 트랜스젠더퀴어의 죽음을 그저 혐오 범죄의 증거, 그리하여 사회적 차별의 근거로만 사유한다면 이것은 삶과 죽음의 관계를 사유할 기회 자체를 박탈할 수 있다. 죽음은 범주를 정당화하는 수단, 그리하여 ‘ㅇㅇ은 트랜스다’와 같은 식으로 주장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의 주장은 지배 규범이 비규범적 존재를 평가하는 바로 그 방식을 반복하는 재생산한다. 죽음은 고인을 특정 범주로 수렴해서 사유할 수 없도록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계기여야 하고, 지금까지 알았거나 죽음을 계기로 조우한 고인의 삶을 복잡하게 재조직하는 시간이어야 한다.(187p)
나의 젠더가 무엇이고, 내가 어떤 젠더를 가진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끌림을 느끼는지를 도식화하는 것만이 정체성으로,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만이 정체화로 상상되는 것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새롭게 하나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더 다양한 가짓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고정되고, 단일하고, 일관성 있는, 통합된 하나의 정체성이라는 상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말해질 수 없는 서사와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하고, 다르게 의미화한 서사와 경험을 새롭게 구조화해 나가기 위한 출발점이기를 바란다.
말할 수 없음에 대해 고민했다. 말하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대치되거나, 그것은 진지하게 이야기될 주제가 아니라고 치부되거나, 내가 특정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위치지어지거나,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한 언어가, 체계가 부재한다고 느낄 때, 그럼에도 그것을 말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220p)
ㅡ 전혜은·루인·도균,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中, 여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