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

 



내가 머무는 동안 알람브라 궁전이 야간 개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생 하렘에서 인생을 보낸 이슬람 군주처럼 보름을 탕진했고,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밤의 알람브라 궁전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그라나다를 떠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저 멀찌감치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만 보면서, 마치 궁전과 후궁을 남겨둔 채 허겁지겁 도망치는 군주처럼. 마드리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중에 다시 와서 밤의 알람브라 궁전을 꼭 봐야지, 하는 초등학생 같은 다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여행에서 두 번 다시란 없으니까. 다시 왔을 때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30-31p)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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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거기, 고단함에.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막막하다.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걷고 또 걸어도 시간은 좀체 흐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관광지를 둘러보다 보면, 세상의 모든 관광지란 홀로 여행하는 자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혼자가 아니었어도 나는 그렇게 열심히 박물관과 미술관, 성과 대성당을 둘러봤을까? 어쩌면 이렇게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홀로 여행하는 일의 부작용일지도. 그리하여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슈퍼마켓에서 산 샐러드와 빵을 먹던 나는 스트레인저stranger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건 어떤 사회적 연결 고리도 없는 단독자를 뜻한다는 것을. ()과 독(), 때로 여행은 그 단어의 뜻을 체험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42-43p)

 

 

모든 일이 그렇지만,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 조금 더 나가면 신천지다.(56p)

 

 

덕분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숨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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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이 일은 두 사지 부작용을 갖고 있다. 우선 오만해지고 독선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 이를 선지자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남의 못 보는 것을 꿰뚫어보는 자는 자기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자를 낮춰볼 수밖에 없다. 싱클레어가 낮과 밤을 나눴듯이 선지자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 역시 세상을 이분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어떤 이분법을 펼쳐도 자신은 좋은 쪽에 속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두 번째 부작용은 음모론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불신하기 때문에 어떤 현상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분석이 필요하다. 분석이라고 썼지만, 선지자 콤플렉스와 결합되면 이는 관심법’, 즉 다른 사람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보는 일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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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도 아니면서 사회현상 속 숨은 뜻을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은 꽤 피곤하다. 그게 대학을 졸업한 후 20년 동안 살아온 인생의 결론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피곤한 건 그게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믿는 이들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사회다. 그런 사회 말고 다른 건 없을까? 종편 채널에서는 같은 사람이 나와서 연예인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재벌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정치인에 대해서도 분석하는데, 무속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게 가능한 일일까?(187-189p)

 

 

당시 경성에서 도쿄까지는 이틀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도쿄에 도착한 이상의 첫 소감은 와보니 실망이오였다. 그렇게 실망할 것이라면 왜 그렇게 도쿄에 가고 싶어했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려면 역시 이틀에 걸쳐 배와 기차를 갈아타면서 도쿄까지 가봐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상념 끝에 나는 잠이 들었다.(196-197p)

 

 

내게 세상의 모든 관광지는 휴일의 놀이공원과 같다. 나는 휴일의 놀이공원을 대단히 싫어한다. 거기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보다 더 많은 무리의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 모두를 거대한 열린 지갑으로 보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란, 두 가지 유형의 사람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지갑을 가진 사람과 거스름돈을 가진 사람.(217p)

 

 

때로 그런 모퉁이에서 길을 잃은 관광객이 내게 묻는다. 물 위의 성이 어디냐고.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나는 모른다. 나도 이방인이다. 그 물 위의 성이라는 곳이 바로 내가 머무는 빌라 콘코르디아를 뜻한다는 사실은 며칠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그게 바로 낯선 도시의 좁은 골목길에서 우리가 하는 짓들이다.(221p)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 컬처그라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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