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

 

이상우의 소설은 어떨까?

 

 

유리와 나는 너무 달랐다. 날이 지날수록 말이 통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W에 대한 이야깃거리도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유리가 어떤 책에 대해 말하면 나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고개만 끄덕이는 식이었다. W가 말없이 자신을 따르는 미란다를 왜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유리도 내 심경을 눈치챘는지 예전처럼 모질게 굴진 않았다. 아니, 표독스러운 말버릇은 여전했지만 유리에 대한 환상을 버린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 우리는 최소한의 대화만을 나눈 채 각자가 고른 책에 빠져들었다.(26-27p)

 

 

책들은 W의 아버지처럼 때리지 않는다. 브룩스 일당처럼 괴롭히거나 같이 할래?”라는 달콤한 말로 기만하지도 않는다. 책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처럼 우리에게 속삭인다. 파라솔 그늘 밑에서도 넌 혼자가 아니라고.(31p)

 

 

미란다의 장례를 치든 뒤 상심에 잠겨 있던 W는 돌연 인스부르크로 떠났다. 고향만은 언제든지 자신을 받아줄 거라고 확신해왔던 터였다.

(...)

얀코가 어떻게 하고 마을을 떠난 줄 알아요? 우리에게 사기를 쳤어요. 농토와 가축이 전부 팔려나갔지. 빈털터리가 돼 자살한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가 W를 내쫓은 건 당연했지요. 당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더 이상 그 집안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아가타 부인은 액땜이라도 하듯 땅에 침을 뱉고 다시 뜨개질을 하기 시작했다. 고향에 대한 W의 환상은 착각이었다.(34-35p)

 

 

포르노 소설을 쓴다고 우리가 방탕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가 아는 포르노 작가들은 하나같이 비실비실한 샌님이었다.

(...)

그러나 포르노 소설을 쓰기 위해선 연애를 멀리할수록 유리하다는 게 정설이다. 불가능의 영역을 모르니까.(50-51p)

 

 

사장 아저씨 말로는 이 동네는 터가 좋지 않다고 한다. 좀도둑과 사기꾼이 들끓어서 자신이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거라나. 옆집 아저씨도, 앞집 아줌마도 똑같이 말한다. 좀도둑과 사기꾼만 아니었으면 자신은 진작 이곳에서 벗어나 부자가 됐을 거라고 말이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도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아저씨의 말이 무엇일지 짐작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는 이 동네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구체적으로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 듯 머뭇거렸다.(216p)

 

 

돈을 벌지 않으면 영감이 몰아닥치거나 직장이 없으면 글 쓸 시간이 솟아날 것 같았지만 겪고 보니 둘 다 아니었다. 삶은 의미 있지도 않고 무의미하지도 않다. 그동안 내가 깨달은 거라곤 이게 유일했다.(278p)

 

 

르네 도말은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주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309p)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현실의 시간을 쫓아오지 못한 인간이고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오한기 소설의 동시대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조언.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동시대인을 참으로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자란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자, 하지만 그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정지돈이 말했다. 아감벤에 따르면 특정 시대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동시대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인은 시대의 빛이 아니라 어둠을 인식하기 위해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서로 다른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323p)

 

 

오한기, <의인법>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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