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3
한편 우리는 타인의 신중한 행동ㅡ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처신ㅡ에 매혹당하거나 호의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매혹은 결과적으로 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남들이 드러나지 않게 처신하고 함부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모습은 마냥 좋게만 보인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꿍꿍이 없는 미덕만을 본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에게 그처럼 안이한 확신을 주는가? 왜 엄청난 은폐, 완벽한 위선, 각별히 세련된 형태의 나르시시즘이나 단순한 비겁함을 보지 못하는 걸까?(35-36p)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마땅히 경이롭고 현명하며 올바른 태도이지만 ‘반대로’ 무분별하게 굴거나 교만과 허영을 떠는 것도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다. 드러내지 않기가 드러내지 않기와 반대되는 것의 조건이기 때문이다.(91p)
특히 성 토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이웃에게 자기는 갖지 못한 좋은 면이 있다거나 이웃에게는 없는 나쁜 면이 자기에게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겸손하게 이웃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낮춘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사유다. 사실 겸손에는 자기모욕이 없다. 심리적인 자기모욕이든 사회적인 자기모욕이든 그런 것은 겸손과 무관하다. 겸손은 그저 타자가 가장 형편없는 인간일지라도 그에게 아직도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섬세한 지각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우리가 오늘날 드러내지 않기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드러내지 않기라는 경험의 중추는ㅡ아직은 그 경험이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릴지라도ㅡ자기증오나 자기에 대한 염려와는 무관하다. 그 중추는 순전히 타자들에게로, 대타자에게로, 피조물들에게로, 세계로 향해 있다.(91-92p)
사실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통제당하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더 이상 숨을 곳, 자기만의 아지트, 한순간이라도 타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면, 자기 생각을 아무 위험 없이 있는 그대로 글로 쓸 수 없다면, 친아버지, 아내, 어릴 때부터의 친구가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비밀스러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 이상 끔찍한 일이 있을까? 전체주의는 각 사람의 비밀을 파내기 위해서 신체 안까지, 꿈속에서까지 밀고 들어온다. 물론 더 극악무도한 일들도 있었다. 이름 없는 가혹 행위, 대량 학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콜리마 수용소. 그러나 파렴치함으로 따지자면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이 불가능성은 어마어마하고 잔악한 학살 바로 다음 순위에 올 만하다. 비밀도, 미스터리도, 한 점 그림자도 없는 삶, 자기와 타자 사이에나 자기와 자기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는 삶은 절대적인 무한 공포로 치닫게 마련이고 장기적으로는 우리 안의 인간성을 모조리 말살할 터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미 1940년대 말에 그 점을 강력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전체의 공포는 모든 인간을 서로가 서로에게 떠밀리게 압박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을 말살한다.”(130-131p)
드러내지 않기와 공적인 장은 이중적인 상호전제 관계에 있다. 공적인 장이 있어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거기서 물러나거나 접근하거나 할 수 있지만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공적인 장을 예정된 파괴에서 보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야 공적인 발언이 경청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말을 해야만 고독이 고립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다.(134p)
드러내지 않기는 주기적인 방식으로만 행복을 줄 수 있다. 미결 상태, 정지와 재개이 지점, 생산적인 공백, 새로운 확장을 기다리는 수축, 새로운 쟁취를 기다리는 이탈로서.
물론 이러한 시각에서라면 영원하고 결정적이며 확고한 행복은 없다. 그리고 행복을 삶의 궁극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하다. 행복은 고된 노력들 틈에서 잠시 느끼는 기대에 불과하다. 그러한 행복은 삶 속에 있지 삶의 끝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게 나쁜가? 장담하건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행복의 추구’에 전념하는 사회들은 어차피 행복에 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속까지 병으로 곪은 사회들이다. 오히려 행복보다 높이 있지만 한정되어 있는 목표들, 가령 자유, 아름다움, 정의, 진실, 창조, 위대함 등에 전념하는 편이 건강하다. 그런데 그렇게 건강한 사회 안에서도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되는 행복의 순간들은 드러나지 않게 처신할 줄 알고, 남들이나 자기 자신을 내버려둘 줄 알고, 인생의 일요일에 맘 편히 초원에 드러누우러 떠날 줄 아는 순간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빠져나옴의 행복’에 붙일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은 ‘유연성’이다.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심오한 내면생활을 위해서 세계와 타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 좋고 나쁜 일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유연성이란 끊임없이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만 그 포기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다.(160-162p)
사랑의 유일한 방식은 들뢰즈가 말한 대로 타자를 “그의 미지의 공간과 더불어”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침범이나 집착 없이, 드러나지 않게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자식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은 자식에게 집착하지 않고 그 아이가 장차 부모를 떠나서,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잘살 수 있도록 기르는 것 아닐까? 부모 입장에서 자식들 사는 모습은 늘 궁금하겠지만 그런 물음을 조금씩 줄여나가고 부모의 개입도 조금씩 줄여나가면서 그저 자식의 자유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마찬가지 맥락에서, 친구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식은 그들이 나의 현존이나 나의 편의에 맞춰주기를 바라지 않고 카프카가 「심판」에서 여자들의 매력을 두고 말하듯 ‘다가오면 취하고 떠나가도 말리지 않는’것밖에 없지 않을까? 좀 더 일반적으로는 세계와 자연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 또한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내재적인 세계와 자연 그 자체로서, 자기 아닌 모든 것에 종속되지 않는 세계와 자연으로서 사랑하는 것 아닐까?(163-164p)
반대로 진정한 드러내지 않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보이지 않게 하면서 남을 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볼 수 있는데도 보지 않고, 때로는 보기는 보되 타자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침해하거나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앗아가는 일이 없게끔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 바로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어주되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내주되 드러내지 않으며, 알아차려주되 지배하지 않는 것을?(164-165p)
ㅡ 피에르 자위, <드러내지 않기> 中, 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