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1
그냥 평범했다.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 그렇게 소멸은 정확하고 슬픈 것이었다.(35p)
여름밤 사람들이 집어들고 나가는 아이스크림도 술을 마신 뒤에는 늘 달고 차가운 것을 사 먹던 산주의 표정을 떠올리게 했다. 경애는 산주가 그것을 차가워서 먹는 건지 달콤해서 먹는 건지 궁금했다. 언젠가 산주는 단지 빨리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 적이 있었다. 술을 마시고 난 뒤에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런다고.(60p)
그러니까 인생은 손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포기해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의 번뇌와 갈등, 고통, 어떤 조갈증, 허기 같은 건 지병처럼 가져가야 하는 것이었다.(143p)
한 개인에 대해 이렇게 폭풍처럼 많은 것들을 알아버리는 건 기이한 경험이었다.
(...)
그때는 페이스북을 통해 편지를 보내는 다른 회원에게 그랬듯이 자신이 상대방보다 낫고 더 많이 알고 강인하며 깨어 있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경애가 더이상 익명의 페이스북 회원이 아니게 되면서 상수의 그런 우쭐함은 사라져버렸다. 경애를 돕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상수는 경애가 자신이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며 이메일을 보내왔을 때 평소처럼 정신 차리라든가, 그거 정말 똥 밟는 일이에요, 남자들은 원래 다 그럽니다, 성욕을 채우려면 어떤 사탕발림도 마다하지를 않아요, 아주 시를 쓰지요, 릴케가 따로 없어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상수는 그렇게 양말 하나 벗지 않고 앉아 있던 산주 앞에서 경애가 느꼈을 모욕감을 떠올리며 조용히 분노했을 뿐이었다. 아마 경애가 그랬을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듯 마음이 오므라들었다. 기가 죽고 축소되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란 그렇게 함께 떨어져내리는 것이었다.(207-208p)
“경애씨, 내가 영업 비밀 하나 가르쳐줄까? 동생 같아서 그러는 거야.”
“뭔가요?”
“여기서는 절대 금방 떠날 사람처럼 굴면 안돼. 떠나는 사람들한테 사이공은 지쳤거든. 일주일 있더라도 이십년 있을 것처럼 행동해야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기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버티는 줄 알아?”
“어떻게 해야 버틸 수 있는데요?”
“내가 한 이삼일 내로라도 짐 싸서 한국 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해. 안 그러면 못 버텨.”(218p)
나는 지금 네가 얼마나 외로울지 짐작이 간다.
얼마나 외로운데?
내가 12월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새해의 첫날로 넘어가는 딱 그 자정에 물류센터에서 지금처럼 야근하고 있었거든.
넌 특근비 나온다고 늘 그때 야근하니까.
그래, 그러다보면 나도 카운트다운을 한단 말이야. 십, 구, 팔, 칠, 육, 오····· 땡, 하는데 상품이 뚝 떨어져내리는 거야. 바로 배송하는 상품은 이미 포장까지 다 돼서 창고에 있다가 전산으로 주문하면 컨베이어 타고 오니까. 보니까 100개들이 지퍼백이야. 내가 그거 바코드 찍어서 옮기면서 야ㅡ 너도 여간 외로운 인간이 아니구나 했지. 새해가 되자마자 한 일이 지퍼백 주문이라니. 사람 다 외롭다, 100개들이 지퍼백처럼 다들 외로워.(226p)
에일린은 푸미흥에 올 때마다 이곳의 ‘클린함’에 큰 인상을 받는다고 했다. 전봇대도 노점상도 오토바이도 없다면서. 신도시를 만들면서 전기시설을 모두 지하에 매립했기 때문에 호찌민의 좁고 어지러운 거리에 마치 새둥지처럼 전선과 케이블이 마구 엉켜 있는 전봇대들이 여기에는 없었다. 푸미흥에 살면서도 이 동네가 호찌민의 풍경과 유독 다른 이유를 깨닫지 못했던 경애에게는 그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발견의 눈을 갖지 못한다면 삶이 다르게 보일 가능성은 제로가 되는구나 싶었던 순간이었다. 경애는 궁금했다. 그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되는지. 이를테면 주말 내내 틀어박혀 어떤 감정기복을 이기며 있다가 갑자기 문밖에 못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272p)
경애는 자기가 인생을 길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기회라는 것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만들어낸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일종의 시험에 가깝다고.(285p)
ㅡ 김금희, <경애의 마음> 中,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