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12

 

 

이렇게 왜 음악은 매력적인가?’라는 질문에 대응하는 방식이 음악의 기쁨의 빼어난 점이다. 기존의 교양 클래식 음악서들은 수필에 가까운 음악 감상이나 인상비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묘사와 비유로만 이루어진 인상비평만을 접한 독자들은 음악을 감상하는 방법이 주관 이외에는 없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감상이 굳어지면 음악 감상은 소비의 경험으로만 남는다. 그냥 아, 좋구나 하고 들을 뿐이다. 그래서는 음악은 해석 불가능한 낭만주의적 신비에 머무르고 만다. ‘내 마음을 흔드는 천재들의 위대한 미스터리’, 그러다보면 결국 어차피 음악은 글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라거나 내가 좋아하는 게 가장 좋은 거다라는 쓸쓸한 결론에 이르고야 만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쓸쓸한 말이다. 왜 쓸쓸하냐면 질문을 던지(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더 해주고 싶은 말도 더 알고 싶은 점도 없다. 오직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는 걸로 만족할 뿐이다.

물론 사랑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 개중에는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호감을 사랑의 원동력으로 삼고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역마살과 손재수를 타고난 이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개는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을 더 알고 싶어지고 이해하고 싶어진다. 사랑은 자신의 세계 바깥에 존재하던 객체를 자신의 세계 속으로 포섭하려는 욕망과 그에 따른 노력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의 대상을 향해 던져지는 질문은 자신이 질문을 던지는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 표현(나는 그를 내 안으로 초대하고 있다)이며, 그 결과로 떠오르는 감상이란 자신이 앞서 던졌던 질문에 대해 성의껏 구한 답으로서 도출되는 것이다.

감상은 즉흥적인 찬사와 짧은 시적 흥취만으로는 절반도 이루지 못한다.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감상이란 찬탄에서 촉발된 기도와 응답의 체계다. 사랑의 신비는 비록 나중에 오해에 불과하다고 밝혀지더라도(또는 응답받지 못하더라도) 우선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만이 비로소 그 사람 안에서 세계의 한 부분으로 기능한다.

요는, 공부를 하면 좋다는 이야기다.

(...)

그러나 최소한의 지식 없이 어떤 시스템의 체계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일반 독자를 배려한답시고 난이도를 낮추다 못해 기초적인 수학 공식마저 배제한 수많은 교양 물리학 책들이 이미 그러한 실패를 증명한 바 있다. 도구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언어로 이루어지지 않은 철학 입문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면 모를까······. 요는, 역시 공부를 하면 좋다는 이야기다.(57-59p)

 

 

문화 활동과 문화 비평은 최종적인교양 활동으로 자본주의라는 문명 형식에 좀 더 맞서고 있는가. 아니면 인문사회과학을 향유한다는 것이 마치 사주팔자처럼 실제 실현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자기충족적인 심리적 위안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가.

행동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텍스트는 스펙터클의 형태로 소비되며, 그 과정은 하나의 대중적인 취미활동, 분리된 영역에 대한 분리된 비판의 확대된 장의 형성에 그친다. 종교가 아편과 같은 것이라면 독서로 종료되는 혁명은 알코올이다. 여기에 취할수록 육신의 힘은 풀리고 암울한 현실을 마주할 엄두를 내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오직 감탄하기 위해 좀 더 세련되고 강렬한 텍스트이론을 찾아 헤매는 여정은 보다 완벽한 꿈을 꾸기 위해 보다 많은 생을 잠에게 내어주는 꼴이다.(151p)

 

 


최원호, <혼자가 되는 책들> , 북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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