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11

사놓고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읽었다. 아쉬운 점은 영화를 통해 전체적인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로 봐서 몰입도가 조금은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책은 다른 매체이고 다 읽은 뒤의 감상으로는 책과 영화 모두 흥미로웠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언 매큐언 소설들(토요일, 체실 비치에서, 속죄)의 특징은 주제를 점층적으로 쌓아올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읽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의미가 없다. 끝까지 읽어야 한다(다른 책이야 안 그렇겠냐마는). 게다가 묘사가 끝도 없이 길어지는 경우도 있고, 속죄 같은 경우에는 분량도 만만찮아서 초반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겉으로 드러난 내용과 반전(?)을 제외하고도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책이다.


그녀가 이렇게 흥분하는 것은 선과 악, 영웅과 악당이라는 피곤한 투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세 사람 중에는 악한 사람도 특별히 선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굳이 교훈이 있어야 할 까닭도 없었다. 단지 타인의 마음도 똑같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살아 숨쉬는 각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66~67p)

언젠가 손님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무슨 분야인진 몰라도 과학을 가르친다는 어느 교수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큰 장식촛대들 위를 날아다니는 벌레 몇 마리를 가리키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 벌레들을 빛 속으로 유혹하는 것은 빛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라고 했다. 벌레들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빛의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려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곤충들 눈에 보이는 빛 속의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설명은 궤변처럼, 단지 설명을 위한 설명처럼 들렸다. 어느 누가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것에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것들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세상사를 그르치는 일이며 쓸데없는 짓일 뿐 아니라 화를 부를 수도 있다. 어떤 일들은 정말로 그렇다.(215p)

ㅡ 이언 매큐언, <속죄>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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