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29
너무 뒤늦게 읽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리하여 결국 그녀는 한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이렇게 감시하는 부분과 감시당하는 부분이라는,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두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자기 존재의 모든 면과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을 늘 감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남자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그녀 인생의 성공 여부가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갖는 생각은 이렇게 타인에게 평가받는 자기라는 감정으로 대체된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대하기에 앞서 우선 여자들을 살펴본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결국 어떻게 대접받을지를 결정짓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조금이라도 관여하려면, 여자들은 이 과정을 자기 나름으로 받아들여 내면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여자의 자아에서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부분은 감시당하는 부분에 대해, 그 여자의 자아 전체가 타인들로부터 어떻게 대접받고 싶어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이렇게 여자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대접받는지에 따라 사회에서 그녀가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정해지는 것이다. 모든 여자들은 자신의 모습에서 어떤 것이 허용되고 어떤 것이 허용되지 않는지를 결정하는 규제의 지배를 받는다. 직접적인 목적이나 동기가 어떻든 간에 그 여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 대접받기를 원하는지를 말해 주는 일종의 표지로 읽을 수 있다. 만약 한 여자가 마룻바닥에 유리잔을 내동댕이치면, 이는 그 여자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예시가 된다. 동시에 이런 행동은 그 여자가 타인들에게 어떻게 대접받고 싶어 하는지를 알려 주는 표지인 것이다. 만약 남자가 이와 동일한 행동을 하면 그의 행동은 분노의 표현으로만 읽힐 뿐이다. 만약 여자가 재미있는 농담을 하면, 그것은 농담에 대한 그녀의 태도와 농담 잘하는 여성으로서 그녀 자신이 타인들로부터 어떻게 대접받기를 바라는가에 대한 표지가 된다. 단지 남자만이 그저 재미있는 짓거리로 농담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55-56p)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거울을 쥐어 주고 그림 제목을 허영이라고 붙임으로써, 사실상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 놓고는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60p)
유럽의 누드 예술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의 의식을 형성한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여성성을 살펴본다.
(...)
하지만 여자를 보는 방식, 즉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75-76p)
유화의 정통에 속하는 평범한 종교화들이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도 똑같은 모순 때문이다. 주제에서 말하고자 한 바가 대상을 그린 방식 때문에 공허해지는 것이다. 회화는 소유자의 즉각적인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촉감을 자극하려는 원래의 경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107p)
광고 자체와 그 광고가 선전하고 있는 것들로 얻을 수 있는 쾌락과 이익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정확히 말해, 광고란 실제 그 자체에 기생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옷이나 음식, 자동차, 화장품, 목욕용품, 햇빛 등은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실제적인 것들이다. 광고는 쾌락을 찾으려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일깨워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광고는 쾌락의 실제적인 대상을 제공할 수 없다. 어떤 쾌락을 얻는 본래의 방식을 떠나서 정말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광고가 따뜻한 고장의 먼 바다에서 수영하는 즐거움을 더욱 확실히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광고를 보는 구매자들은 자신이 그곳으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져 있고, 수영할 수 있는 기회가 자기와는 아주 멀리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광고가 선전하는 물건이나 기회를 아직 즐겨 보지 못한 구매자에게 진짜로 제공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광고란 결코 쾌락 자체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미래의 구매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항상 구매자들에게, 그들이 팔고자 하는 상품이나 기회에 의해 자신이 매력적인 인물이 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 이미지를 본 구매자들 자신이 마치 그렇게 된 것인 양 느끼게 하여 자신의 변한 모습을 부러워하게끔 한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그들을 남들의 선망의 대상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가. 그건 바로 다른 사람들의 선망이다. 광고란 어떤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회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다.(153-154p)
광고에서는 본질적으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광고는 그것 이외에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을 때만 효력이 있다. 광고에서 모든 진짜 사건들은 예외적인 일이고 남들에게나 생기는 일이다. 방글라데시의 사진을 볼 때 그 사건은 비극적이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 사건들이 데리나 버밍엄과 같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났다면, 그 콘트라스트는 그에 못지않게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
광고는 계속 연기되는 미래에 근거를 두기 때문에 현재를 배제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생성과 발전의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린다. 광고 안에서의 경험이란 불가능하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광고 밖에서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이다.(177p)
ㅡ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中, 열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