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4
리베로 파르리가 무신론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닌 것은 그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한두 시간을 내서 조금 알아볼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되었을 터였다. 아무튼 그는 신부들을 좋아하지 않았다.(37p)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기 위해서든 아들이 계속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한 치의 의심도 배어 있지 않은 그 엄격한 태도에서 그는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갈 줄 아는 것, 어른의 큰 걸음으로 무정하게 걸어가되 아들이 이해하고 작은 걸음으로도 따라올 수 있도록 분명하고 규칙적인 걸음으로 걷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이의 앞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되 아이가 길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하고 함께 걷는 것이 땅에 쓰여 있는 것처럼 의심할 바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40p)
어쨌거나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유는 말하지 않겠어요. 설령 당신이 모든 것을 알고 싶다고 해도, 나 자신에게조차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야 우리 모두의 마음이 더 편할 테니까요.(67p)
어느 날 리베로 파르리는 종이 한 장을 가져다가 아들에게 굽이들을 그려주었다. 먼저 산을 그리고, 산꼭대기에 이르는 길을 나타냈다. 그는 산길이 얼마나 구불구불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굽이들을 일일이 강조해서 그렸다. 울티모는 실망하기는커녕 그 그림에 매혹되었다. 울티모는 탁 트인 지평에 변화를 주는 것이라고는 피아세베네 둔덕밖에 없는 평원에서 자랐다. 이런 아이에게는 차가운 뱀처럼 구불거리며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도로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곡선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그 곡선에 손가락을 대고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갔다.
“산 너머도 이와 비슷해. 다만 그쪽은 내리막길이지.”(69-70p)
이야기야말로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있는 시간을 길게 늘이는 방법이었다. 그는 울티모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호두를 깰 때 아주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며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기상천외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또 어머니가 강물에 빠진 아버지를 건져 올렸던 일이며 아버지랑 다시는 자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연도 이야기해주었다. 이어서 그는 길에 관한 추억을 떠올렸다.
(...)
어찌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저 남들이 다 끝내지 못하고 남겨둔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마무리할 일을 시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91-93p)
다른 곳에서는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라면 전선에서는 죽음이 하나의 질병, 그것도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살아 나가더라도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을 거야. 아마 영원히 그럴걸, 하고 그는 말했다.(143p)
이 유형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기하학은 오로지 적을 앞쪽에 두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유일한 도식에 너무 많은 시간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바쳤다. 급기야 그 도식은 존재의 한 형식이 되고 지각의 확고부동한 틀이 되고 말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선험적으로 주어진 그 기하학의 틀 안에서 벌어졌다.
(...)
그래서 적이 뒤쪽에서 공격 해온다는 가정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의 목록에서 빠지게 되었다. 완전한 고립이라는 비현실적인 맥락에서 실제로 적의 후방 공격이 벌어졌을 때, 그들이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아마도 그것을 전투 상황으로 해석하기보다 전투 자체가 마법적으로 중단되거나 모든 것이 갑자기 붕괴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158-159p)
도로 하나를 건설하려고 해요. 어디에다 낼지는 모르지만 길을 하나 낼 거예요. 아무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길이죠. 아무것도 없는 땅, 막사나 울타리 따위도 없는 땅의 한복판에 닦을 거예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이 아니라 일종의 경주로입니다. 그 길은 세상 어디로도 통하지 않아요. 자기 자신에게로 통하는 길이니까요. 그 길은 세상 밖에 있게 될 것이고 일체의 불완전함에서 멀리 벗어나게 될 거예요. 그것은 지상의 모든 길을 하나로 아우른 길이며 언젠가 길을 떠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다르기를 꿈꾸는 곳이 될 것입니다. 제가 직접 그 길을 설계할 거예요. 그리고 이거 아세요? 저는 그 작업을 아주 오랫동안 하면서 제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굽이 한 굽이를 차례차례 담을 겁니다. 제 눈으로 본 건, 제 눈이 잊지 않은 것을 모두 거기에 담으려고 해요. 그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을 거예요. 서산에 지는 해의 곡선이나 어떤 미소의 주름까지 말입니다. 제 인생을 수놓은 그 어떤 일도 제가 헛되어 겪은 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특별한 땅이 되고 영원한 그림이 되고 고스란한 자취가 될 테니까요.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그 길이 완성되면, 저는 혼자 자동차를 타고 그 길을 달릴 생각입니다. 처음엔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빠르게 달릴 거예요. 두 팔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돌 겁니다. 그러고 나면 제가 하나의 완전한 고리를 주파했다는 확신이 들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저는 제가 출발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멈출 거예요. 그런 다음 자동차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겁니다.(230-231p)
내가 보기에 그건 어리석은 짓이야. 우리를 배신하는 사람들은 많아. 그들 모두에게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봐. 그건 영리한 일이 아냐. 울티모, 그들을 용서하는 게 현명해.
그건 용서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냐. 나는 카비리아를 용서했어. 하지만 나에게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아. 누구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중요한 거야. 죄인은 없어. 존재하기를 멈추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 누군가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야. 그건 정당해.(282-283p)
우리의 삶은 은둔자들의 삶만큼이나 단조로웠다. 우리는 기이한 망명 생활을 하듯 젊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으랴. 그저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을 상상할 수밖에.(301p)
나는 이제 사람들의 고상함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불완전함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그 놀라운 기술을 높이 평가할 줄 안다. 이제 나는 관대하다. 타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러니까 나는 과도하거나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늙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304p)
아무튼 과거의 숱한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일은 다 끝난 이야기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늙어가면서 어느 날 문득 자신의 과거를 또렷하게 인식하는 현상과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전에는 빛이 거의 비치지 않는 무대 뒤쪽의 실루엣이었던 것들이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와 마치 뒤늦게 시작되는 공연처럼 환한 빛을 받으며 그 형체를 온전히 드러낸다. 그러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듯, 마치·····(304-305p)
우리 인간에게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것 같아. 우리의 현재 상태를 불완전함이나 실수로 돌려버리고 갑자기 성장하는 능력, 부끄러움은 남겠지만 다른 건 문제될 게 없다는 듯 지금까지의 우리 자신에게서 훌쩍 벗어나는 능력 말이야. 인생의 그런 이행기에는 뭔가 장엄한 것이 있어. 자기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한데 모아 어마어마하게 용을 쓰면서 어른이 되는 것이거든. 그들이 젊은 시절에 보여주었던 기괴한 면모는 경이로운 형태와 비율로 훌륭하게 재구성 돼. 그 형태와 비율을 규정하는 것은 책임감과 경험의 깊이와 성숙한 육체의 느긋한 움직임이야.
(...)
사실 그런 시기를 보낸 뒤에도 대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해동이 멀어지고 겨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하지.(339-341p)
어머니는 괜찮다고 이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어, 어머니는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므로 예를 들어 내가 신발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문제 될 게 없다고 했어, 어머니는 우리가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므로 설령 내가 신발을 신지 못하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어, 어머니는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겪는 바이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그저 신발을 신는 것이라고 해도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라고 했어. 그러면 나는 신발을 신을 수 있었어.(355-356p)
그러면서 다른 분야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 서킷 쪽에서도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이 직관적으로 떠올린 아이디어가 아무리 기발하고 천재적이라 해도, 세상 전체를 놓고 보면 언제나 똑같은 발상을 한 사람이 쌔고 쌨다는 사실이었다. 개중에는 비슷한 발상에서 출발하여 훨씬 놀라운 변종을 개발해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었다.(425p)
그러고는 연인들은 누구나 사랑은 자기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어떤 사랑도 유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438p)
ㅡ 알레산드로 바리코, <이런 이야기> 中,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