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16
읽기 전부터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컸는데, 생각보다 새로운 내용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었다.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가난한 아이를 구하는 게 당장은 총 인구를 늘리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인구를 감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 막연히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가능한 한 가난한 아이를 구하는 게 좋다는 도덕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극빈층을 없애고, 교육과 피임을 비롯해 더 나은 삶을 제공하여 자연히 인구 감소로 이어지는 현실적인 결과를 도출한 것. 이런 상식적이면서도 당연할 수도 있을 생각을 왜 여태 해보지 못했을까?
인류의 85%가 소위 ‘선진국’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나머지 15% 중 상당수는 두 사각형 사이에 있고, 세계 인구의 6%에 해당하는 13개 나라만 여전히 ‘개발도상국’ 안에 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적어도 서양인의 머릿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대로다. 서양인 대부분은 시대착오적 생각에 사로잡혀 서양 이외의 세상을 바라본다.
(...)
한마디로, 세상은 더 이상 예전처럼 둘로 나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다수가 중간에 속한다. 서양과 그 외,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부자와 빈자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극을 암시하는 이쪽 또는 저쪽이라는 단순한 분류는 쓰지 않는 게 옳다.(46p)
그렇다면 부자와 빈자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오해는 왜 그토록 바뀌기 어려운 것일까?
내 생각에 인간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를 추구하는 강력하고 극적인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대상을 뚜렷이 구별되는 두 집단으로 나누려는 본능인데, 두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실체 없는 간극뿐이다. 우리는 이분법을 좋아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영웅과 악인,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 세상을 뚜렷이 구별되는 양측으로 나누는 것은 간단하고 직관적인 뿐 아니라, 충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극적이다.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항상 그런 구분을 한다.
언론인도 이를 잘 안다. 이들은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서로 반대되는 두 부류 사람들, 반대되는 두 시각, 반대되는 두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구성한다. 이들은 절대다수 사람들이 서서히 더 나은 삶으로 편입되는 이야기보다 극빈층과 억만장자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언론인은 이야기꾼이다. 다큐와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큐는 힘없는 개인을 거대하고 사악한 기업에 맞서게 한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악에 맞서는 선을 주요 인물로 다룬다.(60p)
이처럼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는 흥미롭고 도발적이며 솔깃해서 간극 본능 매우 쉽게 촉발하지만,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세상에는 늘 억만장자도 있고 극빈층도 있으며, 최악의 정권도 있고 최고의 정권도 있다. 그러나 극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다수는 대개 중간에 속하고, 그런 점에서 보면 아주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65p)
그런 식의 생각은 대개 부정 본능 때문이다.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더 주목하는 본능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과거를 잘못 기억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사건을 선별적으로 보도하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상황이 나쁜데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하면 냉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경고: 기억은 대상을 미화한다
예나 지금이나 나이 든 사람은 유년 시절을 미화하면서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고 우긴다. 어느 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쪽에서 그렇다. 세상은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예전은 대부분 더 좋았던 게 아니라 더 나빴다. 그럼에도 인간은 옛날의 ‘진짜 모습’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95p)
그렇다. 만사 오케이는 아니다. 여전히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항공기 사고가 일어나고, 막을 수 있었던 사고로 아이가 죽고, 어떤 것은 멸종위기에 처하고,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고, 남성우월주의자가 있고, 미친 독재자가 있고, 유독성 폐기물을 버리고, 언론인을 수감하고, 성차별로 여자아이가 교육을 받지 못한다. 이런 심각한 일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안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이룩한 발전을 외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터무니없고 스트레스다. 사람들은 내가 그들이 몰랐던 거대한 발전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나를 종종 낙천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화가 난다. 나는 낙천주의자가 아니다. 순진한 소리나 떠벌리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주 진지한 ‘가능성 옹호론자’다. 이는 내가 지어낸 말인데, 이유 없이 희망을 갖거나 이유 없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사람을 뜻한다. 나는 가능성 옹호론자로서 이 모든 발전을 바라보고, 앞으로도 더 발전하리라는 확신과 바람을 갖고 있다. 낙천주의가 아니라 상황을 명확하고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세계를 건설적이고 유용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지닌 사람은 인간의 노력이 이제까지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했다고 판단한 채 그러한 결실을 증명하는 수치를 믿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을 자주 만나는데, 그들은 인류에 대한 희망을 모두 잃었다고 말한다. 아니면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데도 역효과를 보여주는 극적 수치만 믿는 것 같다.(100-101p)
끔찍한 소식을 들었을 때 침착하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라. 이 정도의 긍정적 발전이 있었다면 내가 그 소식을 들었을까? 대규모 발전이 수백 건 있었다 한들 내가 그 소식을 들었을까? 아이가 익사하지 않았다는 소식은? 창밖이나 뉴스에서, 자선단체 홍보물에서 아동 익사 사고나 결핵 사망이 줄었다는 소식을 볼 수 있을까? 긍정적 변화는 훨씬 흔하지만 그 소식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라. 우리가 직접 찾아봐야 한다(104p)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가난한 아이들을 계속 살리면 인구 과잉으로 지구가 멸망할 것이다.”
(...) 절대 아니다! 완전히 틀린 말이다.
극빈층 부모는 내가 앞서 말한 이유로 자녀가 많아야 한다. 아동 노동력 때문만 아니라 일부 아이가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다. 여성이 자녀를 5~8명 정도로 매우 많이 낳는 나라는 소말리아, 차드, 말리, 니제르 등 아동 사망률이 아주 높은 나라다. 그러나 아이들의 생존율이 높아지면, 아이들을 노동에 동원할 필요가 없어지면, 여성이 교육받고 정보를 얻어 피임할 수 있으면, 문화와 종교에 상관없이 남성과 여성 모두 자녀를 적게 낳아 제대로 교육할 꿈을 꾸기 시작한다.
“가난한 아이를 구하면 인구는 ‘단지’ 늘어난다”는 말은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극빈층 탈출이 늦어질 때 인구는 ‘단지’ 늘어난다. 극빈층에 갇힌 세대가 오히려 다음 세대 인구를 더 증가시킬 것이다. 인구 성장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하게 증명된 방법은 극빈층을 없애고, 교육과 피임을 비롯해 더 나은 삶을 제공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삶이 나아진 부모는 자녀를 더 적게 낳는 쪽을 선택했다.(130-131p)
1단계와 4단계 나라에서는 낮은데, 중간 단계 나라에서는, 그러니까 다수 나라에서 높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예를 들어 치아 건강은 1단계에서 2단계로 옮겨가면서 오히려 나빠지고, 4단계로 가면 다시 좋아진다. 사탕이나 과자 등을 사먹을 여유가 없다가 형편이 되면 곧바로 사 먹지만, 3단계 전까지는 정부가 충치 예방 교육에 우선순위를 둘 형편이 못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실한 치아는 4단계에서 상대적 가난함을 보여주는 지표이지만, 1단계에서는 정반대의 지표가 된다.
교통사고도 비슷한 낙타 혹 모양이다. 1단계 나라는 1인당 자동차 수가 적어 교통사고도 적다. 2단계와 3단계 나라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은 걷고, 그 밖의 사람은 승합차는 오토바이·자동차로 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도로와 교통 규제, 교통안전 교육이 여전히 부족해 교통사고는 정점에 이른다. 그러다가 4단계에 오면 다시 줄어든다.(137-138p)
2006년에는 세계보건기구가 드디어 모든 과학적 검토를 마치고 질병통제예방센터와 마찬가지로 DDT를 인간에게 ‘미약하게 해로운’ 물질로 분류하며, 많은 상황에서 건강에 해로운 점보다 이로운 점이 많다고 보고했다.
DDT는 대단히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찬반이 동시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모기가 창궐하는 난민촌에서 DDT는 목숨을 구하는 가장 빠르고 가장 값싼 방법일 경우가 많다. 미국인, 유럽인 그리고 공포에 사로잡힌 로비스트들은 질병통제예방센터와 세계보건기구가 내놓은 장문의 연구 결과와 짧은 권고안을 읽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DDT 사용에 대해 토론할 준비조차 하지 않는다.(166-167p)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는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더 좋은 곳에 쓸 자원을 훔치는 꼴이니까요.”
수치보다 눈에 보이는 피해자 개개인에게 지나치게 주목하면 우리 자원을 문제의 일부에만 모두 쏟아부을 수 있고, 따라서 훨씬 적은 목숨을 구할 뿐이다. 이런 원칙은 부족한 자원을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181p)
우리는 나열된 모든 문제를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그중 더 중요한 문제가 몇 개 있다. 사망 원인에 관한 문제든, 예산에 관한 문제든 나는 전체의 80%를 차지하는 문제에 먼저 주목한다.(191p)
개인 식별 부호인 핀 코드를 응용해 세계 핀 코드를 1-1-1-4로 만들어보자. 세계 인구 지도를 외우는 방법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왼쪽에 놓고,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10억의 개수로 만든 핀 코드다. 아메리카 1, 유럽 1, 아프리카 1, 아시아 4(반올림한 값). 다른 모든 핀 코드처럼 이 핀 코드도 바뀔 것이다. 유엔은 21세기 말이 되면 아메리카와 유럽 인구는 거의 변하지 않겠지만, 아프리카는 30억이 늘고 아시아는 10억이 늘 것으로 예상한다. 따라서 2100년이면 세계의 새로운 핀 코드는 1-1-4-5가 될 것이다. 세계인구의 80% 이상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194p)
사람들은 ‘밖에’ 있는 온갖 위험을 걱정한다.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이 죽고, 질병이 퍼지고, 비행기가 추락한다. 이 모든 일이 밖에서, 수평선 저 너머에서 늘 일어난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끔찍한 사건은 우리가 사는 안전한 장소인 ‘여기’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밖에서는 날마다 일어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기억하라. ‘저 밖’은 무수히 많은 장소의 합이고, 우리는 한곳에 산다. 물론 나쁜 일은 저 밖에서 일어난다. 저 밖은 여기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저 밖에 있는 모든 장소가 우리가 사는 이곳만큼 안전해도 끔찍한 사고 수백 건은 여전히 저 밖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장소를 하나하나 따로 추적해보면 대부분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그날 하루가 뉴스에 나온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날은 그곳 소식을 들을 일이 없다.(200p)
국가는 달라도 소득수준이 같으면 삶이 놀랍도록 닮았고, 국가는 같아도 소득수준이 다르면 삶의 방식이 천차만별임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책 전체를 채울 수도 있다. 사진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요소는 종교나 문화, 국가가 아니라 소득이라는 점이다.(220p)
어떤 나라에 대한 고정관념은 그 나라 내부의 상당한 차이를 보는 순간, 그리고 문화나 종교에 상관없이 소득수준이 같은 여러 나라 사이에서 상당한 유사점을 보는 순간 무너져버린다.(223-224p)
전체 집단의 특징을 설명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화학물질 공포증은 강렬한 인상을 주는 예외적인 해로운 물질 몇 가지를 일반화한 데서 생긴다. ‘화학물질’이라고 하면 무조건 겁부터 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화학물질로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천연 제품도 그렇고, 공산품도 그렇다. 비누, 시멘트, 플라스틱, 세탁 세제, 화장실 휴지, 항생제 등은 내가 가장 좋아하거나 없어서는 안 될 화학물질이다.(226p)
“가족을 꾸릴 계획이신가요?” 내가 물었다. 무례하게 행동할 뜻은 없었다. 우리 스웨덴 사람은 (요즘) 그런 주제를 즐겨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여성도 내 솔직한 질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성은 웃음 띤 채 내 어깨 너머로 바닷가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가 있으면 어떨까 날마다 생각해요.”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남편을 상상하면 참을 수가 없어요.”(253p)
우리는 단순한 생각에 크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통찰력의 순간을 즐기고, 무언가를 정말로 이해한다거나 안다는 느낌을 즐긴다. 주의를 사로잡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해, 그것이 다른 많은 것을 훌륭하게 설명한다거나, 다른 많은 것의 훌륭한 해결책이 된다는 느낌까지 매끄럽게 쭉 이어지기 쉽다. 세계가 단순해지고, 모든 문제는 단 하나의 원인이 있어 항상 그것만 반대하면 그만이다. 또 모든 문제는 하나의 해결책이 있어 항상 그것만 지지하면 그만이다. 모든 것이 단순하며, 사소한 문제 하나만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세계를 완벽하게 오해한다. 나는 단일한 원인, 단일한 해결책을 선호하는 이런 성향을 ‘단일 관점 본능’이라 부른다.
(...)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시간이 많이 절약된다. 어떤 문제를 밑바닥부터 배우지 않고도 의견과 답을 낼 수 있고, 따라서 다른 문제에 신경 쓸 여유도 생긴다. 하지만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올바른 방법이 못 된다. 특정 생각에 늘 찬성하거나 늘 반대한다면 그 관점에 맞지 않는 정보를 볼 수 없다.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런 식의 접근법은 대개 좋지 않다.
그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생각에 허점은 없는지 꾸준히 점검해보라.(266-267p)
뭔가 잘못되면 나쁜 사람이 나쁜 의도로 그랬으려니 생각하는 건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누군가가 그걸 원해서 그리되었다고 믿고 싶고, 개인에게 그런 힘과 행위능력이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고, 무서울 테니까.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잘못 한 쪽을 찾아내려는 이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294-295p)
나는 앞에서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비난할 사람을 찾기보다 시스템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릴 때도 두 종류의 시스템에 더 많은 공을 돌려야 한다.
인간의 성공 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배우들은, 위대하고 전능한 지도자에 비해 평범하고 지루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칭송하고 싶다. 자, 그럼 세계 발전에 기여했지만 찬양받지 못한 영웅을 위한 퍼레이드를 벌여보자. 그 영웅은 제도나 체계 같은 사회 기반, 그리고 기술이다.(310-311p)
ㅡ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中,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