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17
그러나 정작 둘의 연결이 끊어졌을 때 나타난 결과는 이성이 감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본 것이 아니었다. 이로써 드러난 충격적 사실은 오히려 합리적 추론에는 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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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열정)이 갑작스레 운명을 달리하여 세상을 떠나도 하인(이성)에게는 통치의 능력도 통치의 욕구도 없다.(84p)
인간은 판단이 내려지면(판단 차제도 뇌 속의 비의식적인 인지 장치를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옳을 때도 있고 옳지 않을 때도 있다), 그 근거를 하나둘 만들어내 그것들이 자신이 내린 판단의 설명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근거라는 것들은 사실(해당 주장에 대한) 사후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97p)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 기본이 되는 심리는 패턴 연결이다. 이런 식의 인지는 별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우리는 여기에 떠밀려 뮐러·라이어의 착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착시를 경험할지 말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한쪽 선이 다른 선에 비해 더 길게 우리 눈에 ‘보이기’때문이다. 마골리스는 이런 식의 사고를 ‘직관적 사고’라고 부르기도 했다.
반면 ‘이유를 찾아내는 인지 과정’은 “우리가 어떤 사고를 거쳐 특정 판단에 이르렀는지 설명할 때, 혹은 내가 보기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런 판단에 이를 수 있었는지 설명할 때”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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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머릿속에서는 직관적 판단이 먼저 일어나고(“그건 당연히 잘못이죠!”), 그런 다음에야 천천히, 때로는 고문과도 같이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음, 둘의 피임 방법이 모두 실패할 수도 있고, 그러면 둘 사이에서 나는 아이는 기형아일 겁니다”). 직관은 추론을 일으키는 추동력이지만, 추론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하지 않는다.(98-99p)
언뜻 보면 피험자들이 하버드의 재학생인 만큼 허술한 이유보다 그럴듯한 이유에 더 많이 설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차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학생들의 코끼리는 몸을 틀어버렸고, 이어서 기수가 제시된 논거(그럴듯하든 허술하든)를 반박할 방법을 찾아내면서 두 경우 모두에서 피험자들은 이야기를 똑같이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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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통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기수는 변호사가 고객의 지시에 따르듯 코끼리로부터 신호를 전달받는다. 그러나 기수와 코끼리를 강제로라도 데려다 한자리에 앉히고 몇 분 동안 이야기를 시키면, 코끼리는 기수의 충고나 외부의 논거에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분명 직관이 먼저 일어나고,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사회생활의 전략적 추론도 직관이 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둘 사이의 쌍방향 소통을 더 증가시킬 수 있다.(143-144p)
IQs는 내 편의 논거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가, 오로지 그것만을 예측해줄 수 있었다. 즉, 똑똑한 사람들은 훌륭한 변호사나 훌륭한 공보관 역할을 더없이 훌륭히 해내지만, 상대편의 논거를 찾아내는 데에서는 다른 이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이에 대해 퍼킨스는 “사람들은 전체 쟁점을 좀 더 온전하고 공평하게 탐구하는 데 IQ를 쏟아붓기보다는 자신의 논변을 더 든든히 떠받치는 데 IQ를 쏟아붓는다”라고 결론을 내렸다.(163-164p)
정직한 사람들도 기회만 주어지면 상당수가 남을 속이려 든다. 우리의 연구 결과를 보면, 나쁜 놈 몇이 보통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람들 대다수가 남을 속이는 것으로 나타났고, 남을 속이는 것은 소소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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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실험실 연구를 종합하면 결국 사람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또 발뺌의 여지만 있으면 대부분이 남을 속인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보관은 정당화를 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명수이다. 그래서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도 대부분은 남을 속인 후 실험실을 나가면서 애초 실험실에 발을 들일 때와 똑같이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167p)
옛날에는 많은 정치학자가 삶들이 표를 던질 때 개인적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고 가정했다. (...) 그러나 자녀를 공립학교에 보내는 부모라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시민들에 비해 정부가 주는 학교 지원금을 더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군대에 징집될 젊은이라고 해서 그가 징집 가능성이 전혀 없는 노인보다 전쟁 장기화에 더 반대하고 나서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보험 혜택이 있는 이들에 비해 정부에서 발급하는 건강보험을 더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개인적 이득보다 사람들은 인종, 지역, 종교, 정치와 관련해 자신이 어느 집단에 속했는지를 더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171-172p)
그렇다고 이성적 추론은 접어두고 직감만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소비자 선택이나 대인 관계 판단에서는 때로 직감이 더 나은 안내자이기는 해도, 공공 정책·과학·법에서는 직감을 기초로 삼았다간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 이 대목에서 내가 내거는 핵심은, 개개인이 가진 이성적 추론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가진 능력을 우리는 제한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179p)
물론 이 신성함의 윤리에도 어두운 면은 있었다. 자신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느낌만을 바탕으로 신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간, 다수에게 약간의 모멸감을 일으킬 수 있는 소수 계층(이를테면 동성애자나 비만인)이 사회에서 심한 배척과 잔혹한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성함의 윤리는 더러 자비, 평등, 인간의 기본적 인권과 양립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206p)
그러나 타인이 품은 신념이라도 우리에게 유용한 부분이 있다. 사물에 관한 그들의 신념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의 합리성 안에 잠자고 있던 여러 가능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난생처음, 아니 다시 한 번, 그런 신념들이 가진 힘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똑같이 한 가지 ‘배경막’만 쳐 있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 우리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212-213p)
자연이 초고를 주면, 경험이 그것에 수정을 가한다. ······ ‘내장’이라는 말은 변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경험 이전에 구조화되어 있다는 의미이다.(247p)
그러나 최근 10년 사이 진화 이론가들이 새로이 깨달은 바에 따르면, 인간 이외의 종에서는 호혜적 이타주의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전에만 해도 흡혈박쥐의 경우 다른 박쥐에게서 피를 얻어먹으면 그것을 기억했다가 자신도 피를 나눠 준다는 보고가 널리 있었으나, 이는 호혜적 이타주의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닌 혈연선택에서 비롯된(친족 박쥐와 피를 나누어 먹는) 행동인 것으로 밝혀졌다. 침팬지와 흰목꼬리감기원숭이의 경우 다른 동물에 비해 호혜성의 증거가 잘 발견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어 확신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호혜적 이타주의 체계는 단순히 고차원의 사회성 지능이 있다고 해서 돌아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324p)
새로운 사실. 나도 저자가 말한 것과 비슷하게 알고 있었는데 지식을 수정함.
물론 여러분은 생면부지의 남을 평생 돕고 사는 정도는 되어야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혹시 그런 이들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찾아가 취재를 하고 그 소식을 저녁 뉴스거리로 전할 정도이다. 그러나 다윈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같은 목적과 가치를 지니고 집단적으로 하는 행동에 이타주의의 초점을 맞추면 이야기가 달라진다.(357p)
옥시토신은 사람들을 자기 집단에 엮어주지, 인류 전체에 엮어주지는 않는다. 겨울 뉴런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자신과 같은 도덕 매트릭스를 가진 사람에게 특히 잘 공감하도록 한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믿을 수 있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별로 개연성 없는 이야기이다. 그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편향적 사랑, 즉 서로에 대한 동질감,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 무임승차자에 대한 억제, 이 세 가지를 통해 강화되는 그 편향적 사랑이,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이 아닐까 한다.(436p)
그렇다면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이웃과 시민으로서 더 나은 자질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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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결과, 종교인의 훌륭한 자질에 있어 종교적 생활이나 믿음은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지옥을 믿는가, 매일 기도하는가, 가톨릭·개신교·유대교·모르몬교 중 무엇을 믿는가 등의 이 모든 것은 종교인이 베푸는 아량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종교가 이루어내는 도덕적 선행과 확실하고 강하게 연관된 사실은 단 하나, 바로 사람들이 동료 종교인과의 관계에 얼마나 단단히 얽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덕 매트릭스 안에서 맺어지고 이루어지는 우정과 집단 활동이 이타심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최선을 이끌어내는 힘도 바로 그것이었고 말이다.
퍼트넘과 캠벨은 믿음을 강조했던 신무신론파의 입장을 거부하고 마치 뒤르켐의 입에서 나온 듯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바로 종교적 소속감이다.”
퍼트넘과 캠벨의 연구를 보면 종교가 오늘날 미국에서 하고 있는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미국에 엄청난 양의 사회적 자본이 쌓이게 된 것은, 나아가 그 혜택이 흘러넘쳐 외부인에게까지 미치게 된 것은, 결국 종교 덕분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가지고 종교가 어느 때나, 또 어느 곳에서나 대체로 주변과의 경계를 허물고 많은 이에게 선행을 베풀어왔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나는 종교가 일련의 문화적 관습이며, 나아가 그것이 다차원 선택을 통해 우리 안의 종교적인 마음과 서로 공진화해왔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따라서 집단 차원의 선택이 어느 정도 일어나는 한, 종교도 우리의 종교적인 마음도 당연히 편향적이 될 수밖에 없다.(즉, 집단 내부를 돕는 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종교가 아무리 보편적 사랑과 자비를 설파하더라도 말이다.(474-475p)
도덕성 정의에 대한 내 작업이 다음과 같은 뒤르켐의 말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사람들 간에 연대를 형성시키는 모든 것, 나아가·····자신의 자아보다·····커다란 무엇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을 규제하게 만드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도덕이다.” 뒤르켐은 사회학자였던 만큼 개인의 자아를 제약하는 사회적 사실들(개인의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사회적 사실들의 실례로는, 종교·가족·법률을 비롯해 내가 도덕적 매트릭스라고 칭했던 공통의 의미 네트워크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심리학자인 만큼 도덕성과 관련한 요소가 마음 바깥은 물론 우리의 마음 안에도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갖가지의 진화한 심리 기제들, 즉 도덕적 감정들, 내면의 변호사(혹은 공보관), 여섯 가지 도덕성 기반, 군집 스위치 등이 이러한 내적인 요소에 해당한다.(479p)
나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일은 없다. “나는 커피에 우유 넣는 걸 좋아하지만 당신은 빼는 걸 좋아하지요. 그렇듯이 내가 따뜻한 심성을 선호해도 당신은 강제수용소를 선호할 수 있어요.” 이 말은 곧 우리에게는 저마다 중시하는 가치가 따로 있고, 그 가치는 다른 무엇에 침해되거나 통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을 나는 틀렸다고 본다.
그 대신 벌린은 다원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데, 그것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와 기질이 여러 가지로 존재하듯이, 이 세상에는 본보기가 되는 이상도 여러 가지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나는 이르게 되었다. ······(가치라는 것은) 무한정 존재하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가치들, 그러니까 내가 인간 본연의 외관과 성격을 유지한 채 추구할 수 있는 가치는 그 수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74개일 수도 있고, 혹은 122개일 수도 있으며, 혹은 27개일 수도 있으나, 그 개수가 어떻든 한정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원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어떤 이가 그러한 가치 중 하나를 추구할 때 나는 그 가치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왜 그 사람이 그 가치를 따르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그가 처한 상황에서라면 나 역시 그 가치를 따르게 될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인간적 이해의 가능성이 싹튼다.(558p)
ㅡ 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中, 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