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24
막 재밌지는 않은데, 앞으로 쓰는 작품이 어떻게 변화해갈지 궁금하긴 하다. 그건 그렇고 창비의 외국어 표기법은 언제까지 저 혼자 이렇게 표기할지 지켜보겠다.
베이루트의 성벽 앞에 현자라 알려진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그에게 물었다.
“왜 신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요? 왜 그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 걸까요?”
그 말을 들은 노인은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벽을 따라 날고 있는 나방이 보이시오? 저 나방은 벽을 하늘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요. 당신이 만약 벽을 하늘로 생각한다면, 저것은 나방이 아니라 새겠지. 그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소. 하지만 나방은 우리가 그것을 안다는 것은 물론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지. 당신은 나방에게 그것을 알려줄 수 있겠소? 나방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겠느냔 말이오.”
“모르겠습니다. 나방에게 어떻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남자의 말이 끝나자 손바닥으로 나방을 탁 쳐서 죽였다.
“보시오. 이제 나방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과 나의 의사를 알게 되었소.”(10-11p)
그때쯤 되니 다들 취해 있었다. (...) 그러면서 보르헤스가 어떻다느니 옥따비오빠스가 어떻다느니 하더니 이어서 제삼세계의 향취가 나는 작가들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는데(알베르또 푸겟이니 오라시오 끼로가니······ 기억도 잘 안 난다) 평소 대화를 나눠본 바로 나는 그놈이 그들의 작품보다는 그저 발음하기 어렵고 어딘지 그럴듯해 보이는 이름들을 들먹이는 걸 좋아할 뿐이라는 데 전 재산도 걸 수 있었다.(38p)
세상에서 소문이 가장 빠른 곳이 있다면 바로 학교일 것이다.(47p)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맥주를 많이 마시고는 신나게 떠들어댔다. 주이에게 이 모임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바르샤바 낭독회의 정식 멤버가 되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낭독에 참여할 거라고 거창하게 선언까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떠들고 나서 심야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웬일인지 갑자기 우울해졌다. 불현듯 회의가 밀어닥쳤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말들이 모두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외로운 사람 몇 명이 모여서 사회적 활동이랍시고 음침한 지하 방에 모여서 희곡이나 읽는 게 아마추어 예술가들끼리 하는 부흥회랑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집에 와서 샤워를 한 뒤 이불 속에 들어가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다시는 그런 머저리 같은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다음에도 그 모임에 나가고 말았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갔다.(68p)
우리는 뜻하지 않은 삶의 위기에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은 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흔한 실비보험 하나 없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일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닥치면 그걸로 끝인 위태로운 것이었다.(116p)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 발견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별나게 운이 좋거나 남의 곡을 그럴듯하게 베낄 재능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때 뭐라도 발견했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알고 있는 삶의 비밀 같은 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무언가 하나는 발견하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체념하는 방법 같은 것이라도 말이다. 우리가 음악에서 즐거움이라도 발견했다면 어땠을까. 곡을 쓰거나 공연을 할 때 언젠가 한번쯤 그런 것의 파편 정도는 발견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어렴풋한 희열의 순간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염병하게도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제는 다 잊어버렸다. 그 파편을 잡고 늘어졌다면 혹시 아나? 3단계를 넘어섰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가 끝내 발견한 것은 전립선암의 위험성뿐이었다.(122-123p)
그러니까 처음에는 우연한 계기로 대학원에 들어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게 되었고 번역작업을 하다가 중간에는 이 일이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믿게 되었는데 평생을 살아보니 지금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인생에 큰 의미를 부여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150p)
신부님은 삶이 지루하지 않나요? 매일 엄숙한 목소리로 설교를 늘어놓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죄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뭔가를 털어놓는 것을 듣고, 그렇게 사는 것이 지루하지 않나요? 저는 이제 스무살에 불과한데도 삶이 너무 지루합니다.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지루해요. 시간은 개같이 느리게 흐르고요. 이걸 언제까지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그런데도 제 할아버지는 죄를 지은 건가요? 단지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요?(153-154p)
우리는 일년 정도 사귀다가 헤어졌다. 이별에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취향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가다가 나중에는 점차 서로의 성격이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뿐이다. 나는 어느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야 모든 연인이 그런 이유로 만나고 또 그런 이유로 헤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83-184p)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자식이 우리의 말을 따르는 건, 까놓고 말해 우리가 그 아이의 팔을 부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야.” 경제적 독립이란 아버지나 어머니가 더 이상 내 팔을 부러뜨릴 수 없다는 말과 같다.(190p)
ㅡ 정영수, <애호가들> 中,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