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6/19
여행지에서 행복해지는 건 의외로 어려운 일이지. 미리 돈을 지불했으니까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잖아. 적어도 들인 돈만큼은 행복해야 할 것 같아서, 망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초조하잖아. 한 번도 안 배워본 춤인데도 좋은 합으로 멋지게 같이 춰야 할 것 같잖아.(112p)
내 자랑이 끝나면 웅이는 오늘의 유머 속 유머를 전한다. 복희는 어제 망원시장에서 본 웃긴 사람 얘기를 전한다. 그리고 각자의 하루 일정을 공유한 뒤 우리는 헤어진다. 이 작은 일과는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지켜내고 싶은 일상 중 하나이다.(125p)
나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매순간이 복희와 웅이의 최선이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최선이 아니었다면 더욱 다행이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가.(213p)
나는 찬이에게 고마워졌다. 그가 기쁜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또한 내가 그의 기쁨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에게 영혼을 되돌려주는 일이기도 하다고 아까의 그 책은 말했다. 타인의 슬픔을 슬픔으로, 타인의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건 영혼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랬다. 축하와 밥과 술을 듬뿍 나눈 오늘 나는 영혼에 대해 생각하며 혼자 밤을 보낸다. 충만함이 공포를 이긴 밤이다.(341p)
그 순간 선이는 이 영화에서 가장 특별한 증언자가 된다. 누구도 단죄하지 않는 유일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사실 선이는 지아가 금을 밟았는지 아닌지 정확히 모른다. 일단 지지한 것이다. 곤란한 순간으로부터 지아를 구원하는 순간 선이의 얼굴에는 언뜻 기품이 스쳐간다. 직접 보거나 직접 들은 사실 없이도, 훔치거나 훔치지 않았다는 정확한 증거 없이도, 우선 믿고 그 앨 살리는 일을 그녀가 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틀리거나 잘못하지 않았음을 믿는 일. 앞으로도 잘못하지 않을 것임을 믿는 일. 아니면 그걸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 일. 혹은 그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지지하는 일.(490p)
쓰고 싶은 이야기가 소중할수록 어떤 문장을 쓸지보다도 어떤 문장을 쓰지 말아야 할지를 골똘히 생각하며 쓰는 나를 발견했다.(528p)
일기를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방금 쓴 문장이 나를 배반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쓰고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어제의 글을 본 사람은 발견한다. 내 ‘진짜’생각, ‘진짜’하고 싶었던 말이 이게 아니었다는 점을. 시간이 흘러 자기가 썼던 글을 다시 읽게 된 사람은 혼란에 빠진다. 이게 정말 내가 썼던 게 맞나? 부끄럽든 생경하든 자기가 쓴 글을 읽는 사람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러한 반응들은 근본적으로 글을 쓰는 목소리의 타자성과 연관을 맺는다. 이 목소리는 내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이면서 내가 아닌 목소리라는 사실을 글을 써본 이들은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561p)
ㅡ 이슬아, <일간 이슬아 수필집> 中, 헤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