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26

 

 

김규항은 ‘취향(taste)’이라는 말을 미적 상대주의와 동일시한다. 하지만 취미에도 ‘좋은’ 취미와 ‘나쁜’ 취미가 있다. 모든 취향이 동등하다면, 공모전은 뭐 하러 하며, 미술관에 ‘이발소 그림’ 대신에 굳이 비싼 피카소의 그림을 걸어놓는가? 대중문화도 마찬가지다. 취미에 기준이 없다면, <슈퍼스타 K>도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시청자 역시 각자 나름의 취향을 갖고 있을 거다. 그들 역시 누가 뽑힐지 예상하고, 그 예측들은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의 구별이 없다면 아마 평론가도 필요 없을 것이다. 김규항이 평론가를 기생충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가 과감히 무시하는 평론에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이 있다. 첫째, 평론은 ‘작가->작품->관객’으로 이어지는 예술 소통의 체계 속에서 ‘피드백’ 역할을 한다. 평론가는 작가에게 수용자의 반응을 전함으로써(관객->작가) 예술 소통의 과정을 ‘원환(圓環)’으로 완성한다. 둘째, 평론가는 미적 취향의 선진적 계층으로서 예술적 소양이 부족한 일반 대중에게 작가와 작품을 매개한다.(274-275p)

 

 

ㅡ 진중권, <미학에세이> 中, 씨네21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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