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23

 

 

예를 들어 특정 시대의 평범한 목소리를 재생하려면 위대한 책들만 읽는 건 문제가 됩니다. 그들은 당시의 평범성을 극복했기 때문에 지금도 읽히는 것이거든요. 위대한 빅토리아조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 상당수는 당시의 평범한 빅토리아조 영국인들과 다른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빅토리아조 여성의 표준으로 제인 에어를 끌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죠. 위대한 책들만 읽다 보면 우린 과거를 왜곡하게 됩니다.(42p)

 

 

문제는 그럴 능력이 없거나 그런 것을 이해할 생각이 없는 소비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 “여자 주인공엔 감정이입을 못 해요.”라고 아주 태평스럽게 말하는 남자들을 의외로 많이 만납니다.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죠. 하지만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그들이 뭉쳐 모인 영토가 의외로 넓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비슷한 자극을 반복하고 싶어 하며, 변화를 거부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 가능하다고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99-100p)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고 도전적인 작가라고 해도 자신이 속한 문화와 시대의 망점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그 사실을 아주 늦게야 깨닫거나 영영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정교하게 만들수록 더 문제가 커집니다. 그 정교한 논리 자체가 왜곡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117-118p)

 

 

2017년에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

당시는 원래 그런 시대였고 김 첨지의 행동도 그 시대를 이해하고 봐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옛날 책을 읽는 독자들이 거쳐야 할 당연한 순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당시의 작가와 캐릭터에 무조건 관대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린 어떤 작품에도 습관적 면죄부를 주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옛 책의 독서는 과거와 현대의 대화입니다. 과거를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 현대의 독자가 작가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생각이 없다면 그 대화는 그냥 끝입니다. 「운수 좋은 날」이 주는 혐오감과 불쾌함이 문학적 감흥보다 더 커진다면 그 소설이 계속 읽혀야 할 이유는 없는 거죠.(204-205p)

 

 

장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관습과 언어를 이해하고, 최신작을 과대평가하지 않기 위해 고전을 먼저 읽으라는 것. 그리고 현재의 흐름을 따라가고 옛날 작품들에 갇히지 않기 위해 최신작도 많이 읽으라는 것.(206p)

 

 

 

ㅡ 듀나 ,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中, 우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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