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27

 

 

그게 다였다. 그 너머에서 그녀가 어떤 새로운 경지에 접근되는 것은 마치 신의 영역을 탐하는 것인 양 허락이 되질 않았다. 어떤 새로운 경지가 나타나야 할 즈음에 그녀는 번번이 권태와 싸워야 했다. 그녀의 권태와도 싸워야 했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권태의 지배를 받고 행하는 모든 무심하고 아둔한 결례와도 싸워야 했다. 그 싸움은 격렬한 것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들어 살 안쪽을 곪게 하는 일처럼 묵묵하게 두 사람을 곪게 했다. 고름이 뚝뚝 떨어지는 한 영혼과 한 영혼이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산책을 했다. 마주 앉아 있었고 손을 잡고 걸었지만, 대화는 활기를 잃었다. 먹지를 댄 낙서처럼, 대화는 언제나 그게 그거였다. 대화에 활기와 긴장이 찾아드는 순간은 누구 한쪽에서, 혹은 두 사람에게, 위기가 찾아온 때뿐이었다. 위기 따위에 흔들리는 관계가 더 이상 아니었기 때문에, 그 새롭고도 심각한 대화를 통하여 더욱 단단해진 믿음과 더욱 깊어지는 이해를 맛보는 건, 예외로 따라온 행복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게 다였다. 좀 더 다른 행복감을 알게 된 것은 축복이었지만, 축복은 거기까지였다.(19-20p)

 

 

그녀는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한참 생각했다. 좋아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들에게 빈축을 살 만한 것일 때에 좋아하는 마음을 쉽게 철회할 수 있는 애호의 세계. 준거집단의 시준에 편입돼야 마음이 편하고 유행을 따라야 뒤처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애호의 세계. 애호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잃는 대신, 같은 걸 좋아함으로ㅆ 소속감을 형성하는 기회를 얻는다. 판에 박힌 것을 싫어하면서도 스스로 판 속으로 들어간다.(48p)

 

 

그녀는 쉬운 입을 어렵게 다루고, 어려운 귀를 좀더 예민하게 다루기로 했다. 귀가 대화 너머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않는다면, 그 귀와 연결된 입은 더 큰 과오를 저지르기 십상이니까. 편안한 우정의 한가운데에서라면, 더욱더 해이해지기 쉬우니까.(89p)

 

 

한 사람이 O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X라고 대답한다. 한 사람이 다시 O라고 말한다. 한 사람은 다시 X라고 대답한다. 한 사람은 다시 표현을 조금 바꾸어 O라고 말한다. 한 사람도 표현을 조금 바꾸어 X라고 말한다. O라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O만을 말하고, X라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X만을 말한다. 표현을 바꿔가며, 예시를 바꿔가며, 관점을 바꿔가며 서로 끝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93p)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심리치유자이며 작가인 스캇 펙은 이 용서라는 개념을 용인이라는 개념과 대비하여 설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흐릿한 이해를 앞세운 후 잘못을 저지른 자를 외면하고 체념하는 것을 용인이라고 한다면, 당신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라며 잘못을 분명히 해두는 것을 앞세운 후에 그자를 다시 포용하는 것은 용서라고.

(...)

스캇 펙이 마치 그녀 같은 사람이 읽으라고 적어둔 듯한 문장을 그녀는 골똘하게 들여다보며 후회를 하다,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졌다. 용서라는 것이 상처를 입힌 자에게 명백하게 잘못을 못 박아두는 일을 전제한다면, 그자가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되 고쳐볼 의지가 없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 때에도 용서라는 것이 작동 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 한 사람의 잘못을 못 박을 자격이 과연 개인에게 있기나 한 것인가. 용서를 하고 다시 포용하는 일이 인간의 미덕 중 최종의 미덕인 이유는 무엇인가. 용서도 용인도 없이, 번뇌에 내던져진 채로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일은 용서하는 것보다 어리석기만 한 것인가. 이해를 하고 용서를 하고 포용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치자. 자신이 용서할 수 없었던 그 잘못을, 그 악행을 저도 모르게 학습해버리고 자신도 물들어버리는 해이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어떻게 익힐 수 있는가.(100-103p)

 

 

도대체 어디까지 용서해야 옳을지를 고민할 때에 그녀는 멈칫한다. 용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거둔다.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윤리마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르르 빠져나가버리는 사태가 두려워서다. 무엇보다 용서하는 주체의 ‘용서-하다’라는 말의 자격을 그녀는 갖고 있지 않다고 여긴다. 용서라는 말이 용서를 하고 싶어 한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용서를 받고 싶어 한 누군가에 의해서 발명된 말 같아서다.(104p)

 

 

외롭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을 그녀는 경계한다. 잠깐의 어색함과 헛헛함을 통과한 이후에 찾아올 더없는 평화와 더없는 씩씩함을 만나볼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아서다. 슬프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슬픔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 또한 그녀는 경계한다. 역시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기만 하다. 외로움에 깃든 낮은 온도와 슬픔에 깃든 약간의 습기는 그저, 생물로서의 한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 조건이라는 걸 그녀는 잊지 않고 싶다.(121-122p)

 

 

그 어느 시대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커다래진 시대. 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 시대. 쉽게 변질되는 사랑과 쉽게 인성을 망가뜨리는 이별을 겪는 일을 이 시대의 청춘들은 굳이 하려 하지 않는다. 연민도 시혜도 자기 자신에게 우선권을 주고, 물질적·정서적 풍요도 자기 자신에게 가장 우선권을 준다. 배려도 스스로에게 하고, 돌봄과 아낌과 희생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행한다. 식당에서 물만 셀프로 따라 먹는 게 아니라, 주요소에서 주유만 셀프로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생에서 스스로에게 그렇게 한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두 개체가 서로 연맹을 하듯 사랑하기도 한다.(138p)

 

 

남자들은 여자들의 무지에 대해 각별해하는 것 같다. 무지한 여자라면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그렇지만, 무지한 여자를 계몽하는 기분을 특히나 즐기지. 남자들은 여자들의 무지에 집중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개입을 하는데, 그 욕망은 하도 집요해서 차마 다른 경우들을 예측할 겨를도 없는 것 같아. 무지한 여자가 무지해 보일 뿐 실은 무섭도록 지혜롭다는 걸, 단지 생존 조건 때문에 무지를 연기하고 있을 뿐이란 걸 눈치챌 겨를이 없지.

(...)

남자들은 생각해본 적 있는 걸 질문해줄 때에 늘 이렇게 말하지. “음, 좋은 질문이야.” 그리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고 신중하게 답을 하지.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되는 경험담을 영웅담처럼 늘어놓지. 그렇지 않은 경우도 가끔 있기는 해. 그럴 때 남자들은 이렇게 말을 꺼내지. “음, 그건 너무 어려운 질문이야.” 그러곤 일축하지.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라고 일갈하거나 위험한 생각이라며 입을 다물게 만들지. 어떤 쪽이든 간에 남자들은 질문을 받고서 새로운 생각이란 걸 하지 않아. 생각했던 것을 생각할 뿐이야. 그래서 남자가 남자에게 질문을 할 때에는 언제고 상대를 시험에 들게 하거나 상대의 시험으로부터 합격하기 위한 목적이 따로 있지. 답을 예상하고 적절한 질문을 고를 뿐이야.(140-141p)

 

 

그녀는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불안이 언젠가는 가라앉게 되고 안정적인 일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믿지 않는다. 물질이든 경력이든 사람이든, 얻었다고 믿었던 안정들은 얇디얇은 유리보다 더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겨우 얻은 것들이 언제 부서질지 몰라 불안했고, 더 얻어야 할 것들을 얻기 위한 더 큰 노력이 첩첩산중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는 막막했다. 한 번도 무엇을 얻어본 적이 없이 그 이미지만을 끊임없이 대여해온 것 같았다.

 

소위 성공의 레퍼토리를 몸소 실현한다고 해서, 그래서 개인의 형편이 좀더 나아진다고 해서, 가중된 불안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는 권리가 그녀에게 생기진 않는 것 같다. 아마도 다른 이름의 불안으로 옮겨가는 일이 생길 것이다. 평생 불안해하다 죽어버리는 수밖엔 없을 것이다.(152-153p)

 

 

 

ㅡ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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