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
불교에 ‘연기’라는 말이 있다. 세상일은 다 그럴 만해서 일어난다. 책임이나 업보, 누구 탓과는 조금 다른 뜻으로 이해한다. 우연과 필연의 완벽한 합치가 이루어질 때 어떤 일은 일어난다. 울고 싶기도 하고 뺨 때려주는 사람도 있고, 그저 그럴 만한 조건들이 정확한 시기에 충분히 갖추어져 나는 대사관을 그만두게 되었다.(121p)
사회 초년생들에게라고 하자면 자격이 부실하고 말이 거창하다. 내 딸들에게는,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자기를 지나치게 괴롭히지 말라고, 그건 노력이나 성실과는 좀 다르다고, 누구든 붙들고 많이 물어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모두 이해한다고 말해주고 싶다.(122p)
아버지의 작품을 어렵다고 하면, 누구에게나 그런 말은 그렇게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니까, “내용이 어려운 내용이니 그런걸. 쉬운 걸 일부러 어렵게 쓰는 게 아닌데. 어렵고 복잡해서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읽어야 하는 글도 있는 거지 이렇게 모두 다 쉽게만 쓰라고 하나 말이다.”할 때도 있고, “그러니까, 어려운 내용도 아주 쉽게 전달할 수 있어야 그게 잘하는 건데”할 때도 있었다.(137p)
아버지는 실망했다. 실망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옳았다. 그렇지 않나. ‘화두’라는 제목. 얼마나 옳았는가. 그 옳음을 알아봐주는 ‘지기’가 가족 안에 없다는 것. 사람을 따로 즐겨 밖에서 만나지 않는 아버지로서는 외로웠을 것이다.
가족 중의 하나는 이제야 이 글을 쓰며 그 외로움을 늦게 짐작한다. 이십 몇 년 전에 너무나도 외로웠을 아버지가 난데없이 가여워서, 오전 아홉 시 삼십사 분에 카페 한구석에서 글을 쓰다가 주책맞게 울음이 너무 솟아서, 줄줄 흘러서,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모듬 과제를 하는 학생들이 자꾸 쳐다보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아주 그렇게 ‘항상 이상한, 미친 사람’은 아니고 그냥 지금 개인적으로 많이 슬픈 일이 있어서 그럴 뿐이라는 것을 증명할 표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결국 그런 건 증명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울음을 참기도 하면서 닦기도 하면서 그러고 있다. 미안해하고 있다.(147p)
집안일은 한 것에 대한 증인은 대체로 없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물증만 남는다.(175p)
ㅡ 최윤경, <회색인의 자장가> 中, 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