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30
그는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뿐더러 그는 참회의 증표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사후의 신장과 두 눈알을 다른 사람에게 바칠 약속까지 해놓고 있었다 하였다. 그는 그만큼 평화로운 마음으로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였다.(71p)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요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75p)
ㅡ 이청준, <벌레 이야기> 中,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