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25

 

 

앉은 자리에서 곧장 절반 정도 읽고, 그 다음날에 다 읽었다. ‘스포츠와 여가를 읽고 난 다음이라 그랬는지 확실히 정제되고도 정제되어 원액에 가까운 단문을 읽고 난 후라 이 소설은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돈에 대해 이야기한다. 돈을 어떻게 써야하는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돈이라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친구이든 연인이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다는 소릴 하자는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관계의 지형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리고 그 영향이라는 것은 결코 작지 않다.

단 한번의 선택으로 인생의 행로가 극적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본문을 인용해 부연해보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진학이며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날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몇 시 전철을 탔는지, 그런 세세한 사건 하나하나까지가 자신을 만들어온 거란 걸 이해했다.”라고 한다. 500% 공감한다.

 

 

가키모토 리카는 1986, 스물다섯 살 때 두 살 연상의 우메자와 마사후미와 결혼했다. 식품회사에 다니는 마사후미와는 전문대학 시절 친구의 소개로 만나 약 1년가량 교제를 한 뒤 결혼했다. 결혼을 계기로 리카는 그때까지 다녔던 카드회사를 그만두었다. 장래 무엇이 되고 싶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하는 명확한 의사도 없이 취직한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고역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즐거웠던 적도 없었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리카는 근무하는 동안 줄곧 생각했었다. 명함에 적힌 자신의 이름은 카키모토 리카의 극히 일부라고, 늘 느끼고 있었다. 그 일부인 채 나이를 먹고, 어느새 자신의 일부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돼버린 게 아닐까 하고 막연히 공포를 느끼고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직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사후미가 결혼 의사를 넌지시 비쳤을 때는 깊이 안도했다. 자신의 일부를 일부로밖에 느낄 수 없는 부분을 완전히 잘라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리카는 미련 없이 퇴사를 선택했다.(67~68p)

 

하루하루는 다시 지루해져 갔다. 색깔 예쁜 도시락을 만들고, 아침 식사를 차리고 마사후미를 배웅하고, 텅 빈 집을 청소하고 다닌다. 한 주에 한 번 요리교실에 가서 배운 것을 며칠 안에 그대로 만든다. 빨래를 널고, 이불을 널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점심을 먹고, 저녁 메뉴를 생각하여 자전거를 타고 슈퍼에 간다. 텔레비전을 켜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영상이 매일같이 나왔다. 리카는 전혀 흥미 없는 그 영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혼 초에는 아무런 의문도 없이 하던 일이 점점 색이 바래지고, 마치 영상 속의 장벽처럼 멀리 느껴졌다.(70~71p)

 

우메자와 씨, 단골 고객한테 인기도 있고 성적도 아주 좋아서 말이야.”

이노우에는 설득하듯이 말했다. 리카는 고객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8할이 정년퇴직한 노인들뿐이다. 푸념과 소문얘기, 과거 자랑이며 날마다 생각나는 걸 얘기하고 싶어서 못 견딘다. 그러나 그 얘기를 하는 상대는 도내나 지방에 사는 자식이나 배우자, 취미 클럽이나 지역 모임의 친구들이 아니라, 별로 친하지 않고, 요컨대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고 적당히 흘려들어주는 누군가다. 리카는 그런 얘기를 듣는 게 그리 힘들지 않기 때문에 그저 듣고 있다. 하고 싶은 말도 없으니까 끼어들지도 않는다. 동행한 행원이 없을 때는 사소한 일전구 갈기, 문에 기름칠하기, 병뚜껑 열기도 싫은 얼굴 하지 않고 떠맡는다. 자네가 독신이었으면 우리 며느리 삼았을 텐데, 라는 말을 몇 명한테 들었는지. 요컨대 그런 인기였다.(94p)

 

리카는 무수한 만약의 끝에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거야라는 생각을 계속했지만, 그러나 그 몇 개의 만약을 선택했다고 해도 이렇게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망연해지다가 이어서 천천히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생각해봐야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수한 만약을 자신은 선택하지 않았고, 그리고 1997, 거의 동시에 두 가지 일은 일어났다.(184~185p)

 

그걸로 됐어. 나 늘 생각하지만, 뭔가 하려면 철저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어. 잠깐 손을 댔다가 이내 빼버리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장 옳지 않다고 생각해”(207p)

 

그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서 현관을 열고 거실 문을 열고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마키코를 보고 싶지 않았다. 돈에 관련해 답이 나오지 않는 문답으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가망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귀엽지만, 이제 끝이어도 어쩔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혼, 이라고 소리내어 본다. 지금도 그것밖에 얘기하지 않는 마키코는 위자료니 양육비니 하고 돈 얘기만 열심히 하겠지. 있는 것 전부 다 줘버려도 상관없다고도 생각했다. 아내와 아이에게 송금하기 위해서만 일하는 것,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214p)

 

세상은 예전에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말캉거렸다. 그런가, 돈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세계를 보는 건가, 리카는 생각했다.

레스토랑에서도 바에서도 백화점에서도 부티크에서도, 리카 네를 맞이해주는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 끊이지 않았다. 아주 친절하게, 농담 한두 마디를 섞어서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해주었다. 거기에는 악의도 경멸도 오만불손함도 없고, 그저 포근한 선의만이 있었다. 리카는 은행에 거액의 정기예금이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두가 그렇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현실과 동떨어진듯한 사람들이 있었다. 해맑게 웃고, 목소리가 거칠어지지 않고, 사람을 밀어내지 않고, 쉽게 사람을 믿고, 악의 같은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돈이라는 폭신폭신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왔을 것이다.(252~253p)

 

돈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어째선지 보이지 않게 된다. 없으면 항상 돈을 생각하지만, 많이 있으면 있는 게 당연해진다. 100만 엔 있으면 그것은 1만 엔이 100장 모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처음부터 있는,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것을 누린다.(297~298p)

 

 

가쿠다 미쓰요, <종이달>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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