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5
나는 당신이 ‘충분히 암시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요청들’을 쌓지 않기를 바란다.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면 좋겠다. 우리는 통하니까, 저 사람은 똑똑하니까, 내가 선의로 대하면 나를 선의로 대해주리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막무가내로 베풀고 실망하지 말자.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가도, 말과 글을 분명히 하다 보면 어슴푸레 마음속에 있던 것이 또렷해진다.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다. 여성인 나 자신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내 말을 들리게 만들자. 의심은 집어치우고.(17-18p)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역시 너무 ‘또렷하게’쓰고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쿠션어를 썼을 때 그 속뜻을 짚어 이해하는 일을 나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날이 춥다”고 말하면 알아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라고 응답하지 않는다. 대신 “아, 날이 춥군요”라고 응수한다. 따뜻한 음료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말씀해주세요. 나이 어린 여자에게 차 심부름을 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의 손으로 차를 마실 의지는 없다고요? 그러면 갈증을 참아보면 어떨까요?
직접 대놓고 말하지 않는 것을 우아하다고들 한다. 경험해본 바, 그것은 가진 사람들의 화법이다. 상대가 내 뜻을 한 번 더 생각하고 속뜻을 헤아려준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다리가 아파 잠시 앉았으면 좋겠는데, 여기 의자가 있습니까?”라고 하는 대신에, “여러분은 참 젊어서 좋겠어요, 거뜬하게 서 있으니 보기 좋네요”라고 말하는 편이 더 배운 사람 같다고.
(...) 여성들의 생리작용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화법을 권장하는 게 싫다.
생리한다는 말 대신에 마법에 걸렸다고 하는 게 대표적이다.(21-22p)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이 혼자 에둘러 말한다고 알아서 헤아려주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상대는 나중에 말한다. “그렇게 필요하면 분명히 말하지 그랬어?”(24p)
ㅡ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中,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