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4

 

흥미진진.

 

 

 

내겐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 우리의 유년기는 폭력으로 가득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매일매일 별의별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게 기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힘들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고 타인들도 우리 인생을 힘겹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40p)

 

 

선생님께 책을 돌려주면서 릴라는 이제 「작은 아씨들」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 책을 아직 읽지 못한 나와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했다.(84p)

 

 

아다와 카르멜라와 나는 솔라라 형제와의 일이 일어난 후부터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우리에게 던지는 저속한 말을 못들은 척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릴라는 달랐다. 그녀와 함께하는 일요일 산책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면 시선을 맞받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뭐라고 하면 정말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건지 의심스럽다는 듯이 멈춰 서서 가끔 호기심 어린 태도로 대꾸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남자들은 우리에게 던지는 저속한 농담을 오히려 릴라에게는 하지 않았다.(188p)

 

 

우리뿐만이 아니다. 릴라의 아버지도 마치 예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행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도, 나의 아버지도, 리노마저도 별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스테파노의 식료품점은 이전에 파스콸레의 아버지인 알프레도 아저씨의 목공소였다. 돈 아킬레의 재산과 솔라라 집안의 재산은 모두 과거에 축적된 것이다. 릴라는 자기 부모님과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시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려 하지 않았다. 파시즘에 대해서도 왕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권력남용이나 폭정, 착취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들은 분명 돈 아킬레를 증오하고 솔라라 집안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모른 척하고 돈 아킬레 자식의 가게나 솔라라네 가게에서 자신들이 번 돈을 쓰고 때로는 우리를 그곳으로 심부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고는 솔라라네 가족이 원하는 것처럼 파시스트나 왕정복고주의자들에게 투표를 한다. 그들은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과거일 뿐이니 조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그냥 덮어두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직도 과거의 일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우리까지 그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밀을 되풀이하고 있었다.(210-211p)

 

 

그는 그해 여름 바라노의 넬라 아주머니네 집에서 나를 다시 만나지 못해 괴로웠다고 했다. 오직 내 생각만 했고 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다. 우리의 사랑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 많은 시를 썼고 내게 그 시를 읽어주고 싶다고 했다. 나를 다시 만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며 거부하면 죽어버리겠다고 했다.(379p)

 

이런 새끼들이 아가리만 털고 절대로 자살하지 않지. 제발 좀 죽어라.

 

 

하지만 이제 그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신경이 곤두섰다. 그도 결국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아버지만큼이나 공허한 사람인가. 다른 이들이 자신을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건가. 자신의 재능 말고 다른 이의 재능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오만한 사람이란 말인가.(403p)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넌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

“2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해. 그러면 끝이지.”

“아니, 절대로 멈추지 마. 필요한 돈은 내가 줄게. 넌 항상 공부해야 해.”

나는 조그맣게 웃어 보인 후 릴라에게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언젠가는 학교 공부를 마칠 수밖에 없어.”

“넌 아니야.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부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416p)

 

 

그들과의 이질감 때문에 생긴 불행한 소외감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느낀 것은 오라치오 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던 바로 그 길에서였다. 나는 이 아이들과 함께 자랐고, 이들의 행동은 내게도 자연스러웠다. 그들의 거친 언어는 내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6년 동안 매일같이 이들이 전혀 모르는 길을 걸어왔다. 학생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모든 과정을 훌륭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땐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조금도 사용할 수 없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자제해야 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는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 기껏해야 나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해서 내 주장을 관철시킬 필요가 있을 때만 그런 모습을 잠깐 내비칠 뿐이었다.(426p)

 

 

ㅡ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中,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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