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26

 

 

왜 사냐고 묻는 것이 뜬구름 잡는 소리라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묻는 것이 제대로 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중에서도 책의 제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후자에 대해 더 초점을 맞춘다. 전자에 대해서는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조건같은 책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은 모두 한 번은 죽는다. 나의 부모님도 죽고, 나의 친구들도 죽을 것이며, 물론 나 역시 죽을 것이다. 슬프게도 이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디 앨런은 이런 말을 했다. “we're just temporary people with a very short time in a universe that will eventually be completely gone. And everything that you value, whether it's Shakespeare, Beethoven, da Vinci, or whatever, will be gone. The earth will be gone. The sun will be gone. There'll be nothing.”

 

사람들은 성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 만큼이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자기에게는 벌어지지 않을 일인 것처럼 부정하는 것이다. 상담기법 중에 직면이라는 기법이 있다. 내담자로 하여금 지금까지 직면하기를 거부해 왔던 자신의 감정, 경험 그리고 행동의 영역들을 탐색하도록 돕는 것이다. 정확히 같은 용례는 아니겠지만 이 책을 통해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인간답게 죽는 것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할까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몸의 쇠락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루하루 지내면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대로 적응해 가며 산다. 그러다가 뭔가 일이 벌어지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73p)

 

운이 좋고 꼼꼼하게 자기 관리건강한 식습관, 운동, 혈압 조절, 필요할 때 의학의 도움을 적절히 받는 것를 한 사람은 오랫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나이가 들면서 점점 많은 것들을 잃어 가다 보면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충족하기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버거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 경우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삶의 상당 기간을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로 보내게 될 것이다.

언젠가 벌어질 일임에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그 결과 대부분 아무런 준비 없이 그 단계에 도달한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어떻게 살 것인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지내다가 뭔가 해 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94~95p)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가설이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은 네 손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낼 일이 없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즐거움을 기꺼이 뒤로 미룬다. 이를테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기술과 자원을 얻는 데 몇 년이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더 큰 물결에 연결되고 싶어 한다.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친구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를 넓히는 일에 더 몰두한다.(...)그러나 삶의 사야가 축소되어 눈앞의 미래가 불확실하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삶의 초점은 지금, 여기로 변화하게 된다. 일상의 기쁨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로 옮겨 가게 되는 것이다.(155~156p)

 

스스로는 자율권을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전하길 바라는 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바로 이 점이 노쇠한 사람들에게 가장 크고 역설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가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바라는 일들 중에는 정작 자신은 단호히 거부하는 것들이 많다는 거죠. 자아감을 침해하는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168p)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의료 행위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시간을 좀 더 벌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248p)

 

이것이 바로 수백만 번 반복되는 현대의 비극이다. 우리가 풀 수 있는 생명의 실타래가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 길이 없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실제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싸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혈관에 화학약품을 투여하고, 목구멍에 관을 삽입하고, 살에 수술로 꿰맨 자국을 가진 채 죽어 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 단축시키고, 삶의 질을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의사들이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사들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효과가 밝혀지지 않은 독성 약품을 줄 수도 있고, 종양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할 수도 있고, 환자가 먹지 못하면 영양 공급관을 삽입할 수도 있다. 언제나 무언가 할 일은 있다. 우리는 선택 가능성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우리는 대부분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다. 자동 모드를 켜고 그 뒤에 숨어 버리는 것이다.(266p)

 

그러나 선택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을 하나 하고 돌아서자마자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327p)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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