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1

 

 

그러니까 테레즈의 행동은, 남편에게 말한 “눈에서 불안과 호기심의 빛을 보고 싶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든 비유처럼, 떡을 배터지게 먹었을 때같이 무기력해져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남편이 항상 1 더하기 1은 2이고, 3 더하기 3은 6인 남자였던 탓에 마음이 공허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고기를 씹을 때 남편의 관자놀이가 움직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탓만도 아닙니다. 각각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다 뒤섞여 얽히고설킨 것이 더해졌겠지요. 도저히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설로서는 단지 외적인 행위밖에 쓸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의 재미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테레즈 데스케루도 자신이 한 행위의 이유를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76-77p)

 

 

예컨대 저에게 슬픈 일이 있어서 오랫동안 마음이 괴로웠는데 누군가가 “정말 괴로웠겠군요”라든가 “저도 알아요”라고 한다면 내심 ‘알 리 없어’라고 생각해도 일단 상대에게 미소를 짓지 않을까요.

자신의 내면이랄까, 자신의 슬픔이나 괴로움을 상대가 이해해주지 않고 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눈앞의 상대에 대한 최후의 커뮤니케이션은 미소밖에 없지 않을까요.(80p)

 

 

테레즈는 여러 가지가 보이는 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에도 심취할 수 없습니다. 베르나르에게도 심취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꿰뚫어 봤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까 말한 장면에서 평소와는 다른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그녀에게도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테레즈는 어느 정도 인간을 보는 눈을 갖고 있지만, 정말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독해졌다고 생각합니다.(91-92p)

 

 

연애의 괴로움 중 하나는 우리가 상대에게 하나의 마스크, 즉 이미지를 주고 그것을 받은 쪽은 어느새 그 이미지에 맞춘 마스크를 쓰고 만다는 것입니다.(150p)

 

 

예컨대 아이가 죽어가고 있다고 합시다. 부모는 필사적으로 신에게 기도합니다.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기도하지요. 하지만 아이는 죽고 맙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고 부처님이고 있을 리 있나”하며 신의 존재도 부정해버립니다. 이것은 종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사고입니다.

오히려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이고 부처님이고 있을 리 있나”라며 바로 신의 존재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합니다.(165p)

 

 

이건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환자의 손을 어루만지는 행위에는 위로하는 마음이나 다정함과 동시에 자기현시나 자기만족, 허영심 같은 것도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수녀분 자신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결코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인 이상 좋은 일을 자기만족 없이, 완벽하게 사심 없이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는 사심 없이 하고 있어. 자기현시욕 같은 건 전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쟁이일 겁니다.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할 때 에고이즘은 반드시 섞이겠지요. 이는 인간의 업 같은 것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건 틀림없는 일이고, 그래서 저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수녀분이 자신의 에고이즘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207p)

 

 

 

ㅡ 엔도 슈사쿠,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中,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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