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5/13

 

저자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질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각 작품이 다루는 시대가 모두 과거가 아니었음에도 재미있는 옛날 옛적 얘기를 읽는 느낌이었다. 동아시아권의 독자와 그 외 지역의 독자들이 책을 읽고 느끼는 바에 차이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틸리는 단순히 알고 싶은 것만 가르쳐 주지 않아요. 뭘 생각해야 할지까지 가르쳐 준단 말이에요.(44p)

 

 

아뇨, 센틸리언은 고삐 풀린 알고리즘이에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 점점 더 많이 제공할 뿐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해요. 센틸리언은 우리를 조그만 거품 속에 가뒀어요. 그 속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은 전부 우리 자신의 메아리예요. 그래서 점점 더 기존의 믿음에 집착하고, 자신의 성향을 점점 더 강화해 가는 거죠. 우린 질문하기를 멈추고 뭐든 틸리가 판단하는 대로 따르고 있어요.(56p)

 

 

중립은 지키면서 정보만 제공하는 사업 같은 건 없습니다. 사용자가 틸리한테 선거 후보자의 이름을 물어본다고 칩시다. 그럼 틸리는 그 사람을 후보자의 공식 웹사이트로 안내해야 할까요, 아니면 후보자를 비판하는 웹사이트로 안내해야 할까요? 만약 사용자가 틸리에게 ‘톈안먼’에 관해 물어보면 수백 년에 걸친 톈안먼 광장의 역사를 들려줘야 할까요, 아니면 1989년 6월 4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만 가르쳐 주면 될까요? 검색창의 ‘너만 믿을게’ 버튼은 우리가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센틸리언이 하는 일은 정보를 조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취사선택과 유도, 고유한 주관이 필요하지요.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고 당신에게 진실인 것은, 남들에게는 중요하지도 않고 진실도 아닙니다. 그건 판단과 순위 매기기에 달렸습니다.

(...)

이렇게 전자적으로 확장된 자아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된 이상, 당신들이 센틸리언을 무너뜨려 봤자 금세 다른 대체재가 등장해서 우리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이미 늦었다, 이겁니다. 거인은 이미 오래 전에 램프에서 탈출했어요. 처칠이 이런 말을 했다지요. ‘건물을 만드는 것은 우리이지만, 나중에는 그 건물이 우리를 만든다.’우리는 생각하기를 돕는 기계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 기계가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을 한다, 이겁니다.

(...)

피치 못할 운명과 마주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적응하는 것뿐입니다.(69-73p)

 

 

멍한 기분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내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평생 사냥한 요괴들이 서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다 이미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은 낡은 요술의 힘으로 연명하는 존재였고, 그 요술 없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으니까.(93-94p)

 

 

나는 염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좋아 보이네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염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 보였고, 수척해 보였고, 차가워 보였다. 게다가 아찔한 향수 냄새 때문에 코가 다 찡했다.

하지만 염에게 모진 낙인을 찍고 싶지는 않았다. 낙인찍는 것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의 특권이므로.(97p)

 

 

음악을 사랑하는 알레시아인은 가늘고 단단한 주둥이로 자국이 남기 쉬운 표면, 이를테면 밀랍이나 진흙이 얇게 덮인 금속판을 긁어서 글을 쓴다(부유한 알레시아인은 코 끝에 귀슴속으로 만든 촉을 달기도 한다.). 글쓴이는 글을 쓰는 동안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해서 주둥이가 위아래로 떨리게 하는데, 이로써 기록재의 표면에 홈이 파인다.

이렇게 쓴 책을 읽기 위해 알레시아인은 자기 주둥이를 그 홈에 대고 죽 훑어 나간다. 예민한 주둥이는 물결 모양 홈을 따라 진동을 일으키고, 알레시아인의 두개골 속에 있는 빈 공간이 그 소리를 증폭시킨다. 이렇게 하여 글쓴이의 목소리가 재현된다.

(...)

그러나 알레시아의 책이 지닌 미덕에는 대가가 따른다. 독서라는 행위를 하려면 부드럽고 연략한 기록재의 표면과 물리적으로 접촉해야 하는 탓에 읽을 때마다 본문이 손상되고, 원본의 일부 요소는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고 만다. 내구성이 더 강한 소재로 만든 사본은 당연히 글쓴이의 목소리가 지닌 섬세함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기피된다.

자신들의 문자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알레시아인은 가장 소중한 원고들을 금단의 도서관에 엄중히 보관하는데, 이곳의 출입 허가를 받은 이는 거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레시아인 작가가 쓴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다만 특별한 의식에서 낭독된 원본을 필경사들이 듣고 해석해서 재구성한 새 책을 통해 알려질 뿐이다.(196-197p)

 

 

루스에게는 부탁할 곳도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다. 오로지 자신뿐, 성난, 겁에 질린, 부들부들 떠는 자신뿐이다. 루스는 발가벗겨진 채 혼자이다. 루스 자신은 항상 알고 있었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305p)

 

 

우리가 현재에 존재하는 과거의 목소리에 어떤 역할을 부여할지는,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렸습니다.(487p)

 

 

한 명의 중국인으로서 저는 개인화된 역사관을 철저히 신봉했던 에번에게 찬성하지 않습니다. 에번이 하려 했던 것처럼 모든 희생자의 개별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식으로는 결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거대한 고통 앞에서 우리의 공감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저는 에번의 접근법이 결국에는 감상주의와 선별적 기억에 그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침략 때문에 중국에서는 16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당했습니다. 그 중 절대다수는 신문 일면을 차지하고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핑팡 같은 살육 공장이나 난징 같은 학살 현장에서 희생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수없이 많은 조용한 마을과 도시와 외딴 벽지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중국인들을 학살당하고 강간당하고 또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의 비명은 차가운 바람 속에 흩어져 사라졌고, 결국에는 이름조차 지워져 잊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억될 자격은 있습니다.

모든 잔학 행위의 희생자들이 안네 프랑크처럼 유창한 대변인을 얻기란 불가능하거니와, 저는 역사 전체를 그러한 서사의 집합으로 축소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에번은 풀 수 없는 방대한 문제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느니 풀 수 있는 문제에 먼저 매달리는 것이 미국인이라고 제게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527-528p)

 

 

어떠한 국가도 어떠한 역사학자도, 진실의 모든 측면을 완전히 아우르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실에서 동떨어졌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구는 완전한 구체도 아니고 평평한 원반도 아니지만, 진실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은 구체 모형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우며, 우리는 언제나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완전하고 완벽한 지식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악을 심판하고 악에 맞서야 할 우리의 도덕적 의무를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538p)

 

 

역사라는 급류 속에서 태어나는 이상 우리가 할 일은 헤엄치는 것 아니면 가라앉는 것뿐, 운이 없다고 불평하는 건 우리 몫이 아니니까요.(555p)

 

 

 

ㅡ 켄 리우, <종이 동물원> 中,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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