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7/1

 

 

 

「현대 시작법」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시는 공적 언술이다. 시는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감수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특정한 형식을 익혀야 하는 기술이다. 장르이기도 하다. 시적이라는 단어는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시는 미술이나 음악 같은 다른 여타의 예술처럼 기본적인 교육과 기술 습득을 필요로 한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현대 시를 보는 눈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이 과정을 거치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대부분의 시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모든 장르가 그렇듯 장르에 빠지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유독 시는 감정의 깊이, 진실성 따위로 한번에 깨닫거나 다가갈 수 있는 본질적인 무언가라는 휘장에 둘러싸여 있다. 문제는 그러한 휘장을 적극 이용하는 시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51p)

 

 

새로운 시네필리아는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에 관한 가치판단의 내재적 불안정을 인식한다. 작품의 가치는 형식적 기준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기준에 따라 시간이 지나 상승하거나 하강할 것이다.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자각, 새로운 요청들에 비추어서, 우리는 경배했던 대상들을 재평가할 가능성이나 단념해야 할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 시네마라는 총체는 ‘미투me too’ 세계 속 새로운 시네필의 눈에 전혀 다르게 보인다.(133-134p)

 

 

무언가에 대한 경외심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지만 호기심은 아직 남아 있다. 모든 것이 지루하다고 생각했지만ㅡ특히 세계문학전집 유에서 나오는 수많은 작품들, 문학상 수상작품들, 거장들의 신작들, 주목받는 신예들ㅡ모르는 것과 궁금한 것은 어디서든 나타난다. 모른다는 것은 몇 안 남은 축복이다. 알아가는 것은 몇 안 남은 기쁨이다. 대상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대상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대상을 둘러싼 이미지를 통해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145p)

 

 

 

ㅡ 정지돈, <영화와 시> 中, 시간의흐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