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6
대단히 좋았다. 조금 찾아보니 작가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거의 여과 없이 드러내는 작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들은 창작을 할 때 의식적으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지 않도록 작품을 쓰는 경우가 있고(알게 모르게 자신의 모습이 비춰질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모습을 내놓고 드러내는 자전적인 형태의 글을 쓰는 경우도 있다. 그 중에서 자전적인 글을 쓰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책이라는 것은 한명의 친구가 아닌 다수의 독자를 상정하고 쓰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걸 읽을 불특정다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 그들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고 지레짐작을 한다면 어떨까?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서 발가벗겨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특히 자신의 실제 모습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쓰는 과정 자체가 무척 고통스러울 것 같다. 이 작품을 읽고 나니 보통의 자전적이니 반자전적인 이야기이니 하는 소설들은 감히 장난으로 보인다. 이건 뭐 갖다 댈 계제가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가족사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글을 쓸 때의 그 고통이라는 것은 감히 짐작조차도 할 수 없다.
클라이맥스라고도 할 수 있을 4막에서 티론의 장광설과 제이미의 취중진담(?)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전에도 말했지만, 네 어머니 옛날 얘기는 좀 과장이 섞였어. 집도 대단했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평범했지. 그리고 네 외할아버지도 네 어머니 말처럼 그렇게 훌륭하고 관대하고 고귀한 아일랜드 신사는 아니었어. 물론 좋은 분이었고 사교성도 좋고 말솜씨도 좋았지. 나도 그분을 좋아했고 그분도 나를 좋아했어. 그리고 식품 도매상을 해서 부유한 편이었고 능력도 있었지. 하지만 그분에게도 결점은 있었어. 네 어머니 말야, 나 술 마시는 거 갖고 나무라지만 네 외할아버지 술 좋아하시던 건 잊어버리고 그러는 거야. 네 외할아버지가 마흔이 되실 때까지 술 한 방울 입에 안 댔던 건 사실이지만 그 뒤로 그동안 못 마셨던 걸 다 마셔버렸지. 그분은 샴페인만 드셨는데 상태가 심각했어. 샴페인만 마시는 걸 대단히 고상한 취미인 것처럼 생각했지.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 거기다 폐병이······.(168~169p)
지독한 노랭이 영감이라. 그래, 어쩌면 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구제불능인지도 몰라. 돈이 좀 생긴 뒤로는 술집에서 다른 사람들 술값까지 내주면서 펑펑 돈을 쓰고 못 갚을 게 뻔한 인간들한테 돈을 빌려주고 그러면서 살았지만······. 물론 그건 술집에서 잔뜩 취해 있을 때 얘기지. 집에서 맨정신으로 있을 때는 도저히 그게 안 돼. 돈 귀한 걸 배운 것도 집에서고 늙어서 양로원 들어가는 걸 겁내게 만든 것도 집에서였으니까. 그런 걸 알게 된 후로는 운이란 걸 믿을 수가 없었지. 갑자기 운이 바뀌어 가진 걸 다 잃게 될까 봐 항상 두려웠어. 그래도 땅은 많이 가질수록 안심이 되거든.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긴지는 몰라도 난 그렇다. 은행이 망하면 돈은 날아가는 거지만 땅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니까. 너 아까, 고생이 뭔지, 아비가 어렸을 때 얼마나 힘들었겠는지 알겠더라고 했지. 알긴 개뿔을 알아! 네가 어떻게 알아? 부족한 거 없이 컸는데. 유모에, 학교에, 대학까지 보내줬잖아. 중간에 그만둬서 그렇지. 먹을 걸 못 먹었나, 입을 걸 못 입었나. 하기야 노동을 좀 해보긴 했지. 외국 땅에서 돈 한 푼 없이 고생도 좀 했고. 그건 내가 높이 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낭만이고 모험이었어. 재미 삼아서 해본 거였다고.(180~181p)
널 건달로 만들려고 일부러 그랬어. 내 마음의 한 부분이 그렇게 한 거야. 커다란 한 부분이. 그 한 부분은 아주 오래전에 죽었어. 그래서 삶을 증오하지. 내 실패를 보고 배우도록 너한테 세상을 알게 해줬다는 거, 가끔은 나 자신도 그렇게 믿지만 그건 거짓이야. 내 실패들을 그럴 듯하게 위장하고, 취하는 걸 낭만처럼 보이게 했지. 가난하고 어리석고 더러운 존재에 지나지 않는 창녀들을 매혹적인 흡혈귀처럼 만들고, 노동을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조롱했지. 난 네가 성공하는 게 싫었어. 그러면 비교돼서 내가 더 한심하게 보일 테니까. 네가 실패하기를 바랐지. 항상 너를 질투했어. 어머니의 아기, 아버지의 귀염둥이! 그리고 네가 태어나서 어머니가 마약을 시작한 거야. 네 탓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빌어먹을, 너에 대한 증오를 억누를 수가·····!(207p)
ㅡ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