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12

 

 

“집 나가서 아프면 서럽다”라거나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은 집이 존재하고, 그 집에서는 보호받을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 집은 또한 ‘가족’이 함께 사는 상황을 전제한다. 복지도 여전히 가족에게 맡기거나 가족 단위로 계산한다. 그러나 친족으로만 구성된 ‘가족’이 복지의 단위가 되면, 가족 안에서 안전하지 않거나 집에서 나와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지가 닿을 수 없다.(46-47p)

 

 

유리잔 그림과 ‘취급 주의’라는 글자가 붙은 택배 상자처럼 장애인을 대할 필요가 없다. 조금만 더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되, 모르는 것은 물어본다면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실수가 생긴다면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니 그걸 두려워하지는 말자.(144-145p)

 

 

그래서 체험은 무용하며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해롭기도 하다. 체험을 통해 장애는 ‘불편’하고, ‘아프’고, ‘힘든’것으로, 따라서 장애인은 ‘불행한’사람으로 인식된다. 체험은 몸의 경험이므로 참가자는 편견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장애인은 ‘그럼에도 행복한’ 혹은 ‘그럼에도 열심히 사는’사람이 된다. 장애인의 차별 경험은 휠체어 하루 타보면 다 알 수 있는 얄팍한 것이 되어버린다. 체험은 그래서 위험하다. 체험은 어설픈 사이비 당사자성을 잠시 걸쳤다가 벗는 일시적인 연극일 뿐이기에 체험자는 결코 그것을 통해 당사자에게 이입할 수 없으며, 체험이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는 기적이라고 보아도 좋다. 체험은 철저한 타자화를 바탕으로 하며 그 결과는 봉사 활동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현장에서’ ‘겪어서’ 그 힘듦과 고통을 ‘이해’한다는 오만함을 얻게 됨으로써 시혜적 태도는 더욱 강화된다.(167p)

 

 

이런 모든 체험 방식은 경험을 오로지 감각으로 축소해 버린다. 장애를 몸에 결부된 생물학적 요소로 환원하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체험들은 ‘장애인들에 대한 공포와 오해를 줄이고자 기획되었으나, 정작 장애인들의 목소리와 경험은 부재’한다. 따라서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정치적 논의도 사라진다. 즉 체험 행사는 장애를 문화적으로 상상하기보다 개인적으로, 또 제한적으로 상상하는 데 그친다.(171p)

 

 

질병은 그저 불행이 아니다. 불쌍한 것도, 안타까운 것도 아니다. 질병은 다만 삶의 어떤 조건이다. 자는 시간이 바뀌고, 화장실에 가는 횟수가 바뀌고, 먹는 약의 종류와 개수가 바뀌고, 일하는 시간과 장소가 바뀌는, 그런 조건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질병을 그저 어쩔 수 없는 불행으로 보거나 온전히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일터와 가정에서 자기 몸을 돌볼 환경이 제공된다면, 사회가 질병을 치료의 대상보다는 적절히 관리할 대상으로 이해한다면, 환자와 아픈 사람도 얼마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비로소 질병은 죽음이 아닌 삶의 조건이 된다.(209p)

 

 

 

ㅡ 안희제, <난치의 상상력> 中,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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