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18

 

 

아파서 결석하는 경우는 어쩌냐고요? 아프지 말기 바랍니다. 물론 원해서 아픈 사람은 없겠지요. 평소에 잘 씻고 끼니를 거르지 말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한 학기 동안 아프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사안은 아무래도 젊은 여러분들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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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도중에 화장실에 가도 안 되냐고요? 물론 안 됩니다. 여러분은 성인이고, 성인의 자부심은 똥오줌을 참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75-76p)

 

철저히 자신의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이 비장애인이거나 ‘건강한’사람이라고 가정하고 하는 말이라서 이런 얘기가 더는 웃기지도 않고 그저 무신경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보다 나아지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어차피 남이 아닌가. 자기 갱신의 체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보고 있다는 감각을 주고, 그 감각을 익힌 사람은 예속된 삶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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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을 섬세하게 판별하게 되는 일이 꼭 축복만은 아니다. 그에 수반하는 저주도 만만치 않다. 안목이 밝고 섬세해져 대상을 보다 선명하게 보게 되면, 그간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도 감각할 수 있게 되지만, 그간 몰랐던 더러움도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시집을 가까이 해보라. 이제 곧 지하철역에 걸린 시들 상당수가 거슬리기 시작할 것이다. 술자리에서 읊어대는 삼행시들 대부분이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시들 자체는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쓸데없이 까다로운 인간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섬세한 구별 없이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 대충 그런 쪽으로 날아가 봐, 그러다 보면 달에 도착하게 될 거야. 이런 식으로 해서 우주선을 달에 보낼 수는 없다. 방향과 거리를 섬세하게 나누고 계산하여 우주선을 쏘아 올려야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할 수 있다. 과학에만 정교하고 섬세한 구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도, 경험에 합당한 언어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 경험은 사라지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독특한 경험에 맞는 섬세한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포착하지 않는 한, 그 경험은 사라지고, 그만큼 자신의 삶도 망실된다.(82-84p)

 

 

토론하면서 출생증명서의 생년월일을 들먹이며 이기려 드는 상대를 나는 참아본 적이 없다. 상대가 스무 살이고 나는 오십이 넘었다는 사실 하나로 내가 더 성취하고 더 배웠다고 할 수 없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삶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단련된 실력, 삶의 현실을 견딜 수 있는 단련된 실력, 내면으로 감당해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다.(89-90p)

 

 

세상에는 약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 많다. 특히 예언가들을 조심해야 한다. 검증하려야 검증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남발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그 진릿값을 보장할 수는 없다. 프랑스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헛소리를 믿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여전히 헛소리라고. 그동안의 무식을 일거에 날려버릴 벼락같은 통찰, 일종의 인생 역전 만루 홈런을 치게 해주겠다는 약장수들을 조심해야 한다. 공부는 산삼을 찾는 과정이 아니다. 기립성 저혈압 환자를 갑자기 포복형 고혈압 환자로 만들 수는 없다.(94-95p)

 

 

그리고 마침내 때가 온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사놓고 그때까지 안 읽은 책들은 이제 포기하겠다. 이 단계가 되면 내 삶에 들어왔다가 나간 동학들이 남긴 흔적들을 천천히 치우겠다. 부고는 들리지 않고, 다만 근황을 듣기 어려울 것이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작은 응접실의 불을 끄는 거다. 이것이 삶이었나요? 이미 다 지난 일이군요.(96p)

 

 

누군가 인생의 성공 비결을 묻자, 처칠은 이렇게 대답했다. “에너지 절약이 관건이다. 앉을 수 있는데도 서 있어서는 안 된다. 누울 수 있는데도,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103p)

 

 

학술 토론의 장에서 느닷없이 영세중립국 선언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중립이 어떤 지성을 드러내는 신중함이라면 모를까, 그저 중립을 선언하는 것은 무관심 혹은 무지성의 선언과 다를 바 없다. 중립을 선언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중립을 선언했다기보다 지성의 영세 중지를 선언한 것이다.(208p)

 

 

자신의 주장 자체보다도 주장에 대한 비판에 대처하는 자세야말로 자신이 용렬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만천하에 드러낼 기회다. 결함으로 인해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그 결함을 인정할 때뿐이다..(210-211p)

 

 

토론의 장은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다른 의견을 긁어모아 취향의 박물관을 만드는 곳이 아니다. 토론의 목적은 다양성을 무한정 확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여 좀 더 나은 지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것과 타당한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개소리도 의견이니 애지중지해달라고? 모든 견해가 똑같은 정도로 타당하다고? 그건 암세포도 생명이라고 애지중지해달라는 것과 같다.(216-217p)

 

 

즉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곧 어느 정도 상대에게 비판적이 된다는 것이다. 비판적이려면 속칭 황희 정승이 되기를 포기해야 한다. “삼단논법에 비추어 볼 때 이건 말이 안 됩니다”라고 이견을 제시하면, 속칭 황희 정승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왜 매사에 그토록 부정적입니까.” 속칭 황희 정승은 오직 비판적인 사람에 대해서만 비판적이다. 견해를 갖지 않으면 맞지도 않겠지만, 틀리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발전의 여지가 없다.(217-218p)

 

 

토론을 통한 설득이란, 상대가 상당히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람일 경우에나 가능하다. 돼지 저금통처럼 꽉 막힌 사람을 상대로 재차 설명을 시작하는 것은 못 알아들은 농담을 부연하는 것만큼이나 지겨운 일이다. 특히 토론을 진지한 논의를 위한 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친교 시간으로 간주하는 모임이라면, 누군가 비판적으로 나오는 게 기분 나쁠 것이다. 당황스러울 것이다. 빨리 끝내고 술자리에 가서 객쩍은 농담도 나누고, 색소폰도 불어젖히면서 친교의 시간을 가져야 되는데, 이게 뭐람.(220-221p)

 

 

 

ㅡ 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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