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7
고상하고 엄숙하며 진지한 문학만이 진정한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읽어낼 수 없을 소설이다. 아예 멀리하는 게 좋겠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왜 이제야 읽었나 싶을 정도로 최고의 독서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이 나왔을 때 바로 읽어보려 했는데 도입부부터 몰려오는 각주, 미주, 스페인어, 대중 문화 일반에 대한 인용 등에 대해 너무 겁을 내어 던져두고 이번 기회에 읽게 됐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관심도 있고, 정치적 상황 및 관련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으면 훨씬 풍요로운 독서체험이 될 수 있겠지만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충분히 따라가면서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읽다보니 라틴 아메리카의 국제 정세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것 같고, 관심도 생겨서 조금씩 찾아보며 읽었는데 이건 뭐 “마술적 리얼리즘” 운운하는 책들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굉장히 젊은 책이고 사실 번역이 쉽지 않았을텐데 번역도 매끄럽게 느껴졌다. 저자의 첫 단편소설집 “드라운”도 같은 역자가 번역한 걸로 알고 있는데 기대된다.
다리 들어올리기, 윗몸일으키기, 아침 일찍 동네 한 바퀴 걷기 같은 운동을 두어 번 시도해봤지만, 자기만 빼고 다들 여자친구가 있는 게 눈에 띄었고, 그럴 때면 절망하여 다시 먹어댔으며, <펜트하우스> 같은 도색잡지와 던전 설계, 자기 연민에 빠져들었다.
나는 부지런한 거에 알레르기가 있나봐. 오스카의 말에 롤라는 코웃음을 쳤다. 하, 넌 부지런함이 아니라 시도하는 데 알레르기가 있는 거야.(39p)
사람들이 뚱뚱한 사람을 싫어한다고? 그렇다면 살 빼려는 뚱보는 얼마나 더 싫어할지 상상해보라. 그 광경은 사람들 속에 내재된 저 빌어먹을 악마를, 발로그를 끄집어했다.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아가씨들이 길에서 뛰는 그를 보고 차마 못할 말을 던지곤 했고 나이 든 할머니들은 저 뚱보 좀 봐, 구역질나게시리, 라고 했다, 구역질이 난다고. 평소 오스카에게 반감을 표시한 적이 한 번도 없던 해럴드조차 그를 ‘자바 더 벗’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 적대적이었다.(212p)
인생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열심히 행복을 모아봤자 아무것도 아닌 듯 쓸려가버린다. 누군가 나한테 묻는다면, 난 세상에 저주 따윈 없다고 대답하겠다. 삶이 있을 뿐. 그걸로 충분하다고.(246p)
이제 나도 엄마가 되고 보니 우리 엄마는 달라질 수 없었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닫는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왜 이런 말이 있잖은가. 플라타노 마두로 노 세 부엘베 베르데(익은 플라타노는 다시 녹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엄마는 마지막까지도 내게 사랑 비슷한 걸 전혀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나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울지 않았다. 오직 오스카를 위해서만 눈물을 흘렸다. 미포브레 이호(가엾은 내 아들). 당신은 부모가 적어도 언젠간 바뀔 거라고, 나아지는 것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부모는 그렇지 않았다.(249p)
ㅡ 주노 디아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中,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