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5

 

 

 

이제는 가난의 문법이 바뀌었다. 도시의 가난이란 설비도 갖춰지지 않은 누추한 주거지나 길 위에서 잠드는 비루한 외양의 사람들로만 비추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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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강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작은 골목을 지나는데, 1km가 채 안 되는 거리에서 모두가 다른 편인, 재활용품 줍는 노인 무리를 보았다. 물론 그들이 함께 다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경쟁 중이었고 갈림길에 다다르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엔 몰랐지만, 고물은 먼저 발견한 사람의 차지가 되니까 남의 뒤를 따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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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에게 가난은 경쟁을 통해 드러난다. 이들은 경쟁 속에서 팔 만한 재활용품을 획득해 생계를 꾸렸다.(28-29p)

 

 

몇몇 노인들은 가족으로 인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겪기도 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복지계 안팎에서 재고를 요청하고 있는 ‘부양의무자’로 인한 문제다. ‘부양의무자’는 정부가 2000년 10월부터 시작한 국민기초생활제도에서 기초수급자로 지정받는 조건으로서, 개인의 사정으로 기초수급자가 될 때, 자녀/부모의 소득과 재산이 일정 기준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법이 개정되며 부양의무자의 기준에서 손자와 형제·자매, 홀로 남은 사위·며느리를 제외해왔고, 이제는 부모와 자식이 각각 일정 기준의 소득과 재산 이하여야 기초수급자로 지정받을 수 있다. 이는 개인이 아닌 가족 전체의 부를 기준으로 사회복지 서비스를 이용할 자격을 부여한 것으로, 가족이 개인을 부양할 의무가 있다는 옅어진 관습의 흔적이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영자씨는 연락이 끊어진 자식들의 경제적 수준이 기준 이상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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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는 2020년 제2차 기초생활 보장 종합계획을 발표하며, 2021년 노인과 한부모 가구를 대상으로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고, 2022년에는 그 외의 가구를 대상으로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하기로 발표했다. 그렇지만 이는 생계비를 지급하는 생계급여에 한해서만 폐지했을 뿐이며 의료비를 지원하는 의료급여에서는 기준을 일부 완화하는 수준일 따름이다. 의료급여에서 역시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전히 폐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54-55p)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가난한 노인들에 대해 ‘열심히 살지 않은 젊은 날의 결과’라거나 ‘부양해줄 자녀와의 어떤 문제’가 있어 저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단언하고 만다. “역시 가난한 노인들은 가난한 이유가 있어.”라며 혀를 차기도 한다. 그렇지만 노인들의 삶이 순전히 개인의 잘못 때문에 생겨나는 걸까? 가난하고 싶어 가난해진 사람은 없다.

영자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게 한다. 개인의 선택이 우연한 연유로 잘못되었다고 한들, 왜 국가와 사회는 그녀를 구하지 않았을까?(126-127p)

 

 

이들을 ‘청소부’로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노인들은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지만, 이들은 ‘청소부’가 아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 돈을 벌지만, 그 돈은 쓰레기를 버린 이들이 주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행위는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청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게 아니라, 재활용 산업에서 발생하는 돈 일부를 스스로 취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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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먼은 사람들이 기부나 자선활동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빈공층을 인도주의적 관심의 대상으로 제시할 경우, 이들이 처한 운명의 잔인함과 냉혹함에 분노하게 되는데 이렇게 분출된 분노는 ‘안전하게’ 자선활동으로 전환”된다고 했다. 가난한 노인의 문제는 연민과 감동, 그리고 기부와 자선사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정작 필요한 건 ‘안전한’자선활동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 인식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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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빈곤층의 존재란, 끊임없이 불확실성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소비자’의 삶이 야기하는 혐오스럽고 끔찍한 결과를 상쇄하는지도 모른다.(206-209p)

 

 

노인들이 일하는 풍경은 보기 좋다. 그들은 서로의 일을 돕기도 했고, 돈을 번다는 데 뿌듯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렇지만 경로당의 그녀들 사이에는 은근한 이질감이 있었다. 더 가난하지 못해서 이 일을 할 수 없는 누군가와 몸이 아픈 이들은 일하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어떤 이는 사정이 있어 일을 그만뒀다가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빈자리가 없어 난감해하기도 했다. 반면에 일을 하는 이들 역시 일하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했다.(254-255p)

 

 

노인들을 두고 ‘문명화’가 덜 됐다거나, ‘열심히 살지 않은 젊은 날의 결과’가 ‘규칙 없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라며 가타부타 탓을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노인들 역시 나름대로 도시공간을 자신의 몸에 맞춰 전유하고 있다는 점 역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도시는 노인들의 마음과 몸에 알맞을까?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이 차도로 이동하는 이유가 뭘까? 무법자이기 때문일까? 이 사회에서 모두가 신체의 속도와 살아가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는 걸 이해한다면 좋겠다. 노인들이 얼마 나가지도 않는 몸으로 100~200kg이 넘는 리어카를 끄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바닥이 울퉁불퉁할 때, 노인들은 더 많은 힘을 쓰게 된다. 게다가 인도의 폭이 좁은 상황에서라면 지나치는 사람들을 피해야 하기에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쉽게 지치게 된다. 사실 노인들은 차도로의 통행이 위법이라는 걸 알고 있고, 위험하다는 사실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체력을 감안해 위험을 감수하며, 차도를 걷는 중이다. 이런 사정을 이해한다면, 노인에게 ‘몰염치스럽고 이기적’이라는 댓글 하나를 달기보다는 노인이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될 삶을 살 길 바라는 마음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265-266p)

 

 

종교시설은 노인과 여러 면에서 관계를 맺고, 이들을 안도케 하는 기능이 있다. 현재 시점에서는 종교 시설에서 쌀과 같이 부족한 필수 자원을 지원받을 수 있고, 미용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해 현금 소비를 하지 않게끔 한다. 한 달에 한두 번 문안인사를 하는 자녀들과 달리, 성직자와 임원들과 봉사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축복을 나누며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269p)

 

 

ㅡ 소준철, <가난의 문법> 中,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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