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17

 

 

“따로 계산해 드릴까요?”

어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어린이게 책을 받아 아빠와 계산을 마친 다음 다시 어린이게 “따로 담아 드릴까요?” 하고 물으셨다. 어린이 손님은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

“아유, 귀여워 몇 살이야? 아빠 드려야지.”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돈을 내는 것은 아빠니까 아빠 편을 드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린이도 자기를 어르는 말에 넘어갔을지 모르고, 아마 그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점의 정중한 손님 대접이 어린이에게 얼마나 기억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사장님의 모습에도 품위가 있었다.

 

 

기사에 달린 댓글에는 어린이가 ‘피어 보지도 못했다’는 표현이 있었다. 글을 쓴 분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는 틀린 비유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삶은 그런 게 아니다. 삶의 순간순간은 새싹이 나고 봉우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시드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지나고 보면 그런 단계를 가졌을지 몰라도, 살아 있는 한 모든 순간은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내 말은 다섯 살 어린이도 나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소영 씨, 우리 딸 또래니까 말 놓을게”라고 해서 다급히 “안 됩니다”라고 말했던 사람 아닌가. 안 될 일이다. 그럼 친해진 다음에도 되나?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업무상의 관계니까.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기 때문에 소수자라기보다는 과도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노인이 될 과도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어린이도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또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는 사이에 늘 새로운 어린이가 온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는 늘 어린이가 있다. 어린이 문제는 한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왜 안 낳아?”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나는 “왜 낳았어?”라고 묻지 않는데. “안 낳으면 나중에 후회해”라는 말도 들어봤다. 나는 “낳은 거 나중에 후회할걸”이라고 하지 않는데. 차마 그런 식으로 대꾸할 수는 없어서 속상한 순간이 많았다.

 

 

대훈이는 점심때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면서 “드래곤나물인가 그랬어요. (잠시 고민) 맞아요. 드래곤나물. 조금 용처럼 생겼어요”라고 한 적도 있다. 그래, ‘곤드레나물’의 어감이 독특하긴 하지.

 

 

“어린이 여러분,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을 금지하는 것이다. 모든 어린이가 가족과 함께 어린이날을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어린이가 가족과 함께 보낸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어린이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축복의 말이겠지만, 어떤 어린이에게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말이다. 어른들은 그런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어린이 여러분, 불편한 일은 ㅇㅇㅇ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 하루 어린이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른들은 주변의 어린이를 살피고 돕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어린이를 보호합시다.”

이런 말이 좋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이니 뭐니 하는 말도 자제하면 좋겠다.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 살아 있다. 나라의 앞날은 둘째치고 나라의 오늘부터 어른들이 잘 짊어집시다.

 

 

어린이가 가르쳐 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 즉 교육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 된다. 가정과 학교는 교육의 출발점일 뿐 결국 책임은 사회가 져야 한다.

 

 

ㅡ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中,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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