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19
병식은 단순히 ‘나는 병이 있습니다.’하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다. 병식은 병을 인정하고, 이 병을 관리하는 패턴을 만들며, 병적상태에서 자신의 행위가 자신 또는 타인에게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나는 병이 있다.’라고 생각하기만 하는 ‘병식 없는’환자 A와, 병식이 있는 환자 B는 똑같이 조증이 와도 그 사고와 행동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A에게 조증이 왔다. A에게도 자신의 상태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조증 상태가 점점 심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A는 여러 가지 딴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다음 주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조증을 밝혀야 하나? 2주 후에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데 그때까지 가만 있다가 ‘재미 좀 본’다음에 하이텐션으로 놀고 나서 그때 의사에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조증은 규칙적인 속도로 역을 향해 들어오는 기차가 아니라 살얼음에 미끄러져 마구 회전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들이받는 자동차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측불가한 그 진행 속도에 그대로 올라타버려 그는 친구들과의 모임 전에 이미 사고를 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불쾌한 일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인식한 즉시 빠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증상이 악화된다는 것을 알고, 조증이 아무리 발버둥치며 달콤한 말을 해도 귀를 막고 자신을 병원에 끌고 가는 것. 후일을 대비하여 미리 조증의 퇴로를 차단하는 이 행동이 병식 있는 병자의 것이며 여러 가지 불상사로부터 병자를 지킨다.(40-41p)
커밍아웃에서 내가 늘 유념하는 방법론이 있다. 아무리 커밍아웃을 해도 그것은 일회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단발로 끝난다면 상대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커밍아웃은 한 사람이 퀴어로 ‘데뷔’하고 박수받으면 끝나는 일보다는 오히려 끝없고 어쩌면 고될지도 모르는 노정의 시작이다.(44p)
주변 사람들은 한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요즘 살이 쪘다는 둥, 우울증 환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 하지;만 이 작은 사실을 말하지 않기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웃음)
우울증으로 이미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너랑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62p)
우울증은 단절의 병입니다. 내가 오늘 우울증에 맞서 씻고, 먹고, 외출하고, 직장에 나가거나 사회적으로 괜찮은 인간을 연출하고 만족스럽게 잠자리에 들더라도 다음 날엔 끔찍한 기분으로 눈을 뜰 수도 있습니다. 지금 조금 괜찮지만 언제라도 이 길에서 추락할 것만 같습니다. 무엇이든 이어지리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빠질 것이라는 확신만 있습니다. 이것이 우울증의 가장 지긋지긋한 점입니다. 확실한 것은 무가치함, 쓸모없음, 무기력, 무능력, 자신의 추한 모습과 기분, 감정, 정동의 둔마가 또다시 찾아올 거라는 사실입니다. 우울증 환자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끈덕지게 달라붙어 아무리 씻어도 씻어도 벗겨지지 않는 진실입니다.
우울증 환자들은 자기 내면에서 갑자기 긍정적인 무언가가 솟아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기본값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감각하지 못하고, 기력이 없고, 힘이 없고, 삶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행위조차 어려운 상태이므로.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을 과소평가합니다. 많은 경우 스스로 쓸모없고 능력도 없고 타인에게 어떤 긍정적인 인상도 영향도 불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더 심각한 경우에는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가치한 존재이기 때문에 길가의 개미보다 가치가 없다고 진지하게 믿습니다.(67-68p)
일단 항우울제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신비의 물질이 아니다. 약물의 기전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뇌의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에 가까워서, 많이 먹는다고 그만큼 기분이 좋아지는 원리가 아니다.
(...)
많은 약들이 먹으면 먹을수록 효과가 많이 도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 그것은 착각이다. 알코올과 결합한 약물 남용, 자몽주스와 결합한 플루옥세틴 남용 등은 (일시적) 기억과 기억력 일부를 잃기 딱 좋은 결합체다.(152-154p)
우리의 목표는 ‘남들처럼’움직이고 비장애인의 습속을 모방함으로써 견뎌내는 것이 아니다. 이 실험과정은 자신만 알 것이고, 자기만이 이 재활의 고충을 알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는 몇 배로 노력하는 데에 어려움과 억울함을 느끼기 쉽다. 남들이 쉬는 걸 당신은 쉬어줘야 할 것이며, 남들이 먹는 걸 당신은 먹어줘야 할 것이고 남들이 잠드는 걸 당신은 잠들려고 노력을 해야 이룰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 비교하면 박탈감만 심해질 뿐이다. 링에 올라 싸우는 둘은 당신과 당신의 병이지 남들이 아니다. 타인과 겨루는 것은 기나긴 재활 실험 후의 일이다. 그러나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어떤 시점에는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 우수해질 수도 있다. 당신의 지금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변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180p)
마지막으로 자살을 기도한 뒤,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을까?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왔을까?
(...)
그렇지 않다. 나는 자살을 기도한 ‘그날’ 앞으로 보낼 수 있을 많은 시간을 지불하고 일정 부분을 포기했다. 내가 버린 그 ‘나’는 내 인생에서 계속 맴돌 것이다. 그날 그 시간에서 멈춰서 나의 일부는 그 시간에서 산다. 그 생각을 종종 한다.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고의 회로를 빙빙 거치다 보면 자살을 시도한 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미안해하지 않는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선택이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그렇게 드러나는 복잡한 심경들은 필연적으로 ‘그날’이후로 흘러가고 있는 내 시간대로 스밀 것이다. 나이와 성별과 이름이 적힌 팔찌를 차고 오래 깨어나지 않던 나는 링거 줄이 줄줄 매달려 있던 병상에서 뒤척이며 일어나서, 간호사도, 보호자도, 병동의 잠금장치가 걸린 유리문도, 경비도 아무도 몰래 병원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아, 이대로 도망가버릴까?’ 했지만,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살 얘기를 했지만 마치 농담거리인 양 밝고 산뜻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얼마간의 인생을 죽음을 택한 내게 쥐어주고 그냥 떠났다. 그리고 내가 잃은 것은 지나온 삶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이라는 것을 늦게 알았다. ‘그날’ 내가 그에게 건넨 부피만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망실됐다. 이것은 상상된 두려움이 아니다.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제거하고 싶은 대상은 많을 거다.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 특정 인간, 어떤 사실이나 기억 등. 그러나 결국 지불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살아남았어도 당신은 살아나지 못했다. 그는 늘 거기에 있다.(328-330p)
ㅡ 리단,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中, 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