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5

 

누군가의 추천이나 인용으로부터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이 책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추천한 5권의 소설 중 한 권이다. 이제껏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음에도 나만의 취향이든가, 기호라든가, 선호라는 것을 형성하지 못하고 남에게 기댄다. 이것에 대해 수차례 생각을 해봤는데 확실히 어떤 점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억지로 이유를 끼워 맞춰보면 첫째, 시간을 아끼려는 것이다. 일반대중이 아닌 특정 개인들의 영향을 받는지라 적절한 예가 아닐 수도 있지만, 가령 M. 나이트 샤말란의 라스트 에어벤더, 이재용의 다세포 소녀, 맨데이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을 그렇게나 희대의 망작이라고 얘기를 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틀림없이 구릴 게 뻔한 영화를 보는 사람이 있고 특별한 팬이 아니라면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라는 말이다. 반대로 신뢰할만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상찬하는 작품을 모른 척 하기는 쉽지 않다. 둘째,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너무 많다. 정보가 풍부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정보 대홍수 시대의 독서법이라고 자위할 수 있을까. , 음악, 영화 모두 장르라는 것이 있고 각 장르마다 새로운 작품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이중에 옥석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평론가, 영화평론가, 음악평론가 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들은 직업적으로 각 분야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접하고 그 중에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선별하여 평하고 대중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이들을 활용하여 선택의 폭을 좁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영화, 소설, 음악 등을 즐기면서 의외성이나 우연성이라는 요소가 개입되기는 어렵다. 최근 들어 우연히 어떤 영화를 보고 좋았다고 한 적은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우연히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경우가 글자 그대로 아예 없기 때문이다. 의외성과 우연성을 느끼려면 시간을 들이고 품을 들이는 게 요구되는데,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그런 것 까지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므로 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미학적으로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한 영화, 소설에서는 장황한 묘사보다는 단정하고도 정제된 단문을 선호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장황하고 쓸데없는 묘사로 가득한 책이 그리웠다. 단순히 반작용 때문일까. 단문으로 유명한 레이먼드 카버, 헤밍웨이, 제임스 설터의 책을 읽을 때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왜 단문의 글이 더 읽어내기 힘든가. 단문으로 이루어진 글은 일반적인 글에 비해 꾹꾹 눌러 썼을 경향이 높고 더 많은 해석의 여지를 개입시키며 더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 시를 읽어내는 일이 괜히 어려운 게 아니다. 다시 말해 친절하지 않은 책이다. 단순히 활자를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을 독서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나를 포함한 게으른 독자들은 단문을 읽는데 금방 지치는 것이다. 처음엔 여백도 많아 보이고 몇 글자 없어 보여 호기롭게 시작하나 문장이 짧다고 그 문장을 받아들이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짧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책을 읽는 중간마다 덮어두고 평소에는 결코 하지 않을 생각이라는 것을 해야 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들을 곱씹어보며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런 이유로 금방 피곤해지며 술술 읽히는 소설을 읽고자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의 좋은 점이라면 글의 의미와 행간을 읽어내려는 성실한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만족감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좋지 않은 점도 있다. 팔리기가 쉽지 않다. 시가 팔리지 않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팔리기 위해서는 쉬워야 한다. 사람들은 그냥 한눈에 봐도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려주길 원한다. 밥상을 차려 주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밥상을 차려주고 떠먹여주길 원한다. 아니 밥이 제대로 소화가 되는지 확인해주는 것까지를 원한다. 단적인 예로 한국영화가 구려지는 이유는 난해함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설명적인 덧붙임, 열심히 쌓아놓은 것들을 모조리 무의미하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해피엔딩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사람들에게 먹힌다. 티비의 세례나 명사의 추천, 문학상 등을 받지 않았다면 이 책의 운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무얼 말하는가. 겉으로는 사랑 이야기를 한다지만 사랑을 나누는 두 인물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래된 전자상가에서 살고 있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다. 다양한 측면으로 읽어낼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언어에 대한 작가의 예민성이다. 흔히 사람들이 이라는 단어를 물질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데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지고 있는 이라는 윤리적인 의미를 끌어낸다. 또 있다. ‘가마’, ‘슬럼이라는 단어를 통해 개별적 사례들을(가마라는 말로 통칭하지만 사람들의 가마 모양은 동일하지 않다. 슬럼은 빈민이 밀집하고 주거 및 생활 환경이 극히 불량한 지구를 말하나 모든 슬럼가가 동일한 형태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단일한 의미로 종속시켜 버리는 것의 불합리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나 대상의 특수성만을 인정하고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 소통할 수 있는 단어를 만들어낼 수 없다. 범주화라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대화라는 것을 할 수가 없다. 내가 말하는 의미와 네가 말하는 의미가 동일하지 않을 테니. 누구보다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직업작가가 나조차도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작가는 하나의 단어를 사전적 의미로 간단하게 해석하고 치우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자는 입장으로 보인다.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46p)

 

기술에 비해 수리비는 저렴하게 받는 편이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답답하게 여겨질 만큼 느긋한 면이 있어서 까다롭거나 무례한 손님을 만나면 종종 다툼이 벌어졌다. 여 씨 아저씨는 그런 손님들의 물건 안쪽에 페인트로 조그만 표식을 해 두고 후에 그 손님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든가 모르는 척을 하고 기계를 맡겨 오면 뚜껑을 따 놓고 페인트 자국을 확인하며 이 자식 이거 그때 그 자식, 이라며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다음엔 이쪽에서도 모르는 척, 기계를 수리해서 돌려보내곤 했다.(49~50p)

 

. 맞춤법 같은 테크닉을 보지 말고 내 글의 내용에 집중하라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적는 사람이 맞춤법을 틀리는 단 하나의 이유는 게으른데다가 무식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읽지 않고 쓰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맞춤법 틀리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데 갑자기 왜 내용의 좋음을 거론하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다른 언어인가?

 

 

황정은, <백의 그림자>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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