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9
가차 없이 하는 말마다 비수 같이 꽂히네.
다름이 아니라 문제를 곰곰이 따지며 생각해보려는 성향 덕에, 또 아마 좋은 연습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인간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 이 글에서 밝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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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를 두고 벌이는 내 성찰은 이른바 노인의학과는 전혀 상관없다.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물음은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시간을, 자신의 몸을, 사회를, 문명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점이다. 실증과학이 제공하는 충실한 정보, 곧 특정한 상태의 인생에 도움이 될 정보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그러니까 이 책에서 늙어감에 맞춤한 실질적인 지식을 기대한 삶이라면 이 책을 읽고 실망을 금치 못하리라. 나는 그런 정보나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 처지의 사람이 아니다.(6p)
예나 지금이나 나는 늙어가는 사람, 노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비참한 운명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사회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런 방향으로 이뤄지는 모든 고결하고 귀중한 노력이 아마도 약간의 아픔을 덜어주기는 하겠지만, 말하자면 무해한 진통제와 같다는 의견을 여전히 고집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그런 노력은 늙어감이라는 비극적 불행에 있어서 어떤 근본적인 것도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다.(10-11p)
자신이 그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은 노인, 그래서 곧 공간으로부터 몰려나게 될 나이 먹어가는 사람에게는 많은 기만적 위로가 주어진다. 가장 크고 최고로 우롱을 일삼는 환상은 물론 종교이지만, 그 밖에도 기만적 위로는 많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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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위대한 작품의 탄생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작품은 고통의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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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그도 자신들과 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집은 그대로 남으리라. 이 집에서 아이가 자라 다시 아이를 낳고 대를 이어 살아가며 활동하고 작품을 남기겠지. 잿빛의 육중한 묘비가 그 삶의 흔적을 증언하리라. 장롱 위에 그 책들이 뒹굴거나, 미술관 벽에는 그림이 걸리겠지. 또는 세월의 풍파를 맞아 집은 황폐해져 폐허로 변하고 자손들은 사방팔방으로 바람처럼 흩어지리라. 책과 그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내 지워지고 말겠지. 파리의 공동묘지 ‘페르라셰즈’의 늘어선 영묘는 황폐하게 망가져 그 안에는 쥐들만 산다. 그 색 바랜 황금 명패에는 ‘영구 임대 묘지’라는 문구만이 남루하다. 마치 시민의 재산이 적어도 가짜 영원함을 공간에서 구현하기라도 한 것처럼. 집과 마당, 책, 그림, 묘비, 이 모든 것은 죽은 자가 살아 사랑을 누리거나 아픔에 신음하던 밤들과 마찬가지가 되리라. 그런 건 전혀 없었던 것처럼 허망하리라.(42-43p)
“저게 내 얼굴인가 싶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형상을 보며 당혹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그런 때가 많기만 했따.” 그 여자 친구가 쓴 글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증오한다. 눈위로는 마치 모자처럼 생긴 게 머리라고 걸려 있으며, 눈 아래로 보이는 넙데데한 얼굴은 무슨 가방인 것만 같다. 입 주변에는 주름살이 자글자글해 서글퍼만 보인다. 이제는 낙엽으로 뒤덮인 것만 같은 머리를 보며 한숨짓지만 그 낙엽이 떨어지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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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불평이나 탄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노화의 실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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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A가 거울을 통해서만 아니라 일상에서 만져보기도 하는, 그래서 만져보는 손이 기괴하게도 느낌의 대상이 되는, 곧 내가 ‘나 아닌 나’가 되는 깊은 충격이 노화의 진실이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당연하다고만 여겼던 게 돌연 낯설기만 한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소름끼침, 우리 인간의 근본 정서 가운데 일부인 소름끼침은 거울 앞에서 물러나 평소 일상에 뒤덮여 하루 일과를 감당하느라 잊힐 따름이다. 그러나 이 얇디얇은 일상의 층은 늙어가는 인간이 자신의 노화 흔적을 뼈저리게 느끼며 거울 앞에 머무르는 한, 여지없이 깨어진다. 그럼 돌연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라는 것, 곧 ‘나 아닌 나’가 평소 익숙한 나를 문제 삼으면서 충격과 경악이 고개를 든다.(60-61p)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예전에 나는 내 외모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고 믿었다.” 여자 친구가 쓴 글이다. “이렇게 해서 배불리 먹고 건강한 사람은 위장을 잊는 거겠지. 내 얼굴을 그어떤 불쾌감도 없이 바라볼 수 있는 한, 나는 내 얼굴을 잊고 지낸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65-66p)
노화라는 것은 그 자체로만 보면 정상이 아니라 일종의 병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어떤 치유의 희망도 담보해주지 않는 그런 고통이다. 우리가 늙어가는 인간으로서 병에 걸렸다가 다시 의학이 말하는 의미에서 ‘건강’해질 수는 있다. 그렇지만 다시금 건강을 회복했다 할지라도 유기적인 생명이 나선을 그리며 기능을 상실하는 모습에서 더 낮은 점으로 떨어질 뿐이다. 그러니까 예전처럼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의사의 위로가 아무리 만족스럽게 들릴지라도 젊은 시절의 건강은 절대 회복되지 않는다. 오늘 우리는 어제보다 덜 건강해졌으며, 내일의 건강 상태보다는 한 자락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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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해보자. 건강 일반이라고 하는 것은 건강을 잃었을 때에만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게 무슨 대단한 진리는 아니다. 자신이 젊게 느껴진다고 주장은 하지만 실제로 절대 청년일 수 없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건강이 좋은 게 아니다. 좋든 나쁘든 ‘느낌’을 가진다는 말은 그 자체가 별로 신뢰성 있지 않다. 실제로 힘이 넘쳐나며 온전한 건강을 누리는 사람은 ‘느낌’이라는 걸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한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독일의 위대한 의사나 인류학자의 책에서 읽어볼 수 있듯, 건강한 사람은 세상의 일과 사건에 충실할 따름이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덧붙인다면 건강한 사람은 자기 바깥에 머무른다. 그에게 속한 공간에, 떼려야 뗄 수 없이 자아와 맞물린 세계에 나아가는 게 건강한 사람의 태도다.(69-70p)
ㅡ 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中,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