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3/15

 

뭘 받고 싶냐고 물으면 난 그 즉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은 기분이 되어버립니다.(20p)

 

 

존경받는다는 관념 또한 나를 상당히 두렵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인간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자에게 간파되어, 산산조각나고, 죽기보다 더한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존경받는다’는 상태에 대해 내가 내린 정의입니다. 인간을 속이면서 ‘존경’받아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마침내 그의 입을 통해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 순간 타오르는 인간들의 분노, 복수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입니다.(23p)

 

 

또 어느 가을 밤에는,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데 아네사가 새처럼 소리도 없이 어느 틈엔가 내 방으로 들어와, 갑자기 이불 위에 엎어져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우가 날 도와줘야 해. 그럴 거지. 같이 이 집을 나가자. 그러는 게 좋아. 도와줘, 날 좀 도와줘” 하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쏟아내더니 다시 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여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네사의 격한 말에 놀라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진부하고 아무 내용도 없는 푸념에 김이 새버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감을 까서 한 쪽을 잘라 아네사에게 건넸습니다. 그랬더니 아네사는 훌쩍거리면서도, 그 감을 먹고 “뭐 재밌는 책 좀 없니? 좀 빌려줄래?” 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소세키가 쓴「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책꽂이에서 꺼내주었습니다.

“잘 먹었어.”

아네사는 쑥스러운 듯 살짝 웃어 보이며 방에서 나갔는데, 내게 아네사뿐만 아니라 여자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생각하는 것은, 마치 지렁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골치 아파서, 섬뜩한 느낌마저 듭니다. 다만 여자가 그렇게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에 뭔가 달콤한 것을 주면, 그걸 먹고 기분을 좀 가라앉히더라 하는 것만큼은 어릴 때부터 쌓아온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37p)

 

 

아아, 인간은 서로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인 양 평생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상대가 죽으면 눈물 흘리며 조문 따위를 읊어대는 것 아닐까요.(93p)

 

 

아니, 난 결코 돌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아, 광인은 대개 자신들이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지요.(133p)

 

 

남들에게 존경 받으려고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하지만 그런 착한 사람들은 나와 놀아주지 않지.


내가 조숙한 척 행동하면, 사람들은 날 조숙하다고 쑤군덕댄다. 내가 게으른 척 행동하면, 사람들은 날 게으르다고 쑤군덕댄다.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척하면, 사람들은 날, 글 한 줄 못 쓰는 놈이라 쑤군덕댄다. 내가 거짓말쟁이인 척하면, 사람들은 날 거짓말쟁이라 쑤군덕댄다. 내가 돈푼깨나 있는 척 행동하면, 사람들은 날 부자라고 쑤군덕댄다. 내가 냉담을 가장해 보이면, 사람들은 날 냉담한 놈이라 쑤군덕댄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괴로워서 나도 몰래 신음했을 때, 사람들은 날 괴로운 척한다고 쑤군덕댔다.

모든 게, 어긋나 있어.


결국, 자살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나.

이리 괴로워도, 기껏 내 손으로 목숨을 끊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생각하니, 통곡으로 밤이 샌다.(206p)

 

 

 

ㅡ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사양> 中, 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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