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2
또 다른 관심 있는 역자의 에세이.
우울함을 핑계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드라마나 보고 있는 건 언제든 빠져들고 싶은 달콤한 유혹이지만, 그 유혹을 이기고 샤워하고 일하고 청소하고 장을 보고 와서 아이를 웃으며 맞았을 때 그날 하루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한다. 실망스러운 여행지 숙소를 보고 “그래도 전망은 좋네”라고 말하며 활짝 웃는 것이 얼마나 멋진 능력인지 이제는 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았던 일을 곱씹고, 과거를 후회하고, 나 자신을 한심해하면서 하루를 흘려보내기가 더 쉽고, 나는 지금보다 분명히 나아질 수 있다고 믿고 뭐라도 시도해보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럼에도 또다시 참신하고 창의적인 낭패를 안겨주는 것이 어른의 나날이기에 또다시 희망을 갖고 낙관을 유지하기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고된 감정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거기서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폴리애나가 되어야만 하는 순간들이 우리에겐 아주 많다.
메리 올리버는 「긴 호흡」에서 이렇게 말한다.
“젊었을 때 나는 슬픔에 매료되었다. 슬픔이 흥미로워 보였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 줄 에너지 같았다. 늙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제 나이가 든 나는 슬픔이 싫다. 나는 슬픔이 자체의 에너지가 없이 내 에너지를 은밀히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예전만큼 신선하거나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슬픔이나 우울을 신비로움과 창의성의 원천으로 보지도 않는다. 애써 밝은 태도와 표정을 짓기 직전까지 우리 마음에 어떤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는지 잘 안다.
우울은 지성의 부산물이라는 대사에 무릎을 탁 쳤었다. 이제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나의 속없는 웃음은 경험의 부산물이야.”(66-67p)
우리는 나이를 차곡차곡 먹고 있고 어떤 기능은 퇴화하고 있다. 매일 집밥을 차리고 몇 시간 만에 책 한 권을 뚝딱 읽고 퇴근하고 외국어 학원에 가던 30대의 나는 될 수가 없다.
중요한 건, 그만두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 아닐까. 한 달에 한 번이건 두 달에 한 번이건, 석 달에 한 번이나 아무리 띄엄띄엄이라도 어느 날 토요일 아침엔 달리기를 하러 나가듯이 나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했던 습관을 되살리며 살아가면 잘못 사는 건 아니지 않을까.(135p)
나는 처음에는 관심을 받는 편이지만 오래 알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고, 나 자신에게만큼은 꽤나 객관적이라 자부하는 내가 냉철한 평가를 내렸다. 특별히 욕을 먹거나 배척을 당하지는 않지만 나를 계속 찾고 연락을 먼저 하면서 만나자는 사람도 많지는 않다.
나의 인간됨. 그저 나라는 사람이 거기까지다. 인정하자.
그렇게 내려놓으면서 딱 한 가지만 노력하기로 했다. 사람들 말을 듣자. 아주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자. 상대방이 말하도록 하자. 리액션을 잘해주자.
적어도 이건 노력으로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었다.(166p)
말로는 고독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지금도 얼마나 말이 통할 사람, 일상을 나눌 사람을 찾아 헤매는가. 가족으로도 부족해 친구의 근황을 항상 챙기고 혼자 일하기 싫어 작업실을 열고 혼자 책을 읽지도 못해 북클럽을 만들고 글을 같이 쓰기 위해 글쓰기 클럽에 가입하고 SNS에서 나를 보여주지 못해 안달하는 주제에 말이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외로워하고 사람에 금방 반하고 새로운 사람을 인생에 들이는 것과, 그 관계가 없으면 내가 불완전하다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 서로의 삶을 통째로 바꾸었다거나 그 사람을 만나기 전과 후의 운명이 달라졌다거나 서로로 인해 완전해졌다는 커플이나 친구 이야기를 보고 읽고 그들의 행운을 축하하지만, 나에게는 그 행운이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임을 거의 확신하는데 전혀 서운하지 않다.
(...)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기억해주지는 않았지만, 내가 지나왔던 수많은 순간 나 자체로 완전했다는 걸 먼길을 돌아돌아 알게 되었다.(194-195p)
나와는 전혀 닮지 않은 얼굴에 담담한 성격에, 예측 불가능한 반전 유머 감각을 지닌, 나와 노래방은 가지만 퀸 영화는 같이 보기 싫어하는 아이.
너에게 엄마가 사랑하는 음악과 영화와 책을 애써 추천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너는 앞으로 너만의 우주를 스스로 만들어갈 테니까.
그리고 가족끼리 취향이 무슨 소용일까. 나를 키운 건 부모님과 나의 공통점이나 가수나 배우에 대한 대화가 아니라 그들이 우직하고 원초적인 사랑이었음을 한참 후에야 꺠달았다. 그분들이 내가 뭘 좋아하든 내버려두었기에 나는 내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뭘 좋아해’가 아니라 ‘내가 널 있는 그대로 좋아해’라는 걸 우리 부모님에게서 배웠고 우리 딸에게서 또 배운다.(207p)
그 순간, 어린 시절 너그러웠던 부모님에게서도 불만을 찾아내 불평하고, 나의 약점을 몇 배나 부풀린 다음 나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처럼 만들어버리고, 한두 번의 실패 후에 나 같은 인간은 살 가치도 없다고 자조하던 내가 보였다.
내 인생에 더없이 완전한 선물이 저절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이 근거 없는 욕심과 소녀적 이상주의, 내가 가진 아름다운 컬러를 보지 못하는 색맹 같은 나의 시력이 나를 가장 괴롭힌 근본적이고도 고질적인 문제가 아니었을까. 부족한 대로 사랑하고 끌어안겠다고 말하고 글을 쓰지만 그렇게 살지 못했던 시간들은 결국 내가 만들었다. 꽃이 필 수 있는 정원을 메마른 황무지로 만들어놓고 내가 왜 황무지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아이처럼 칭얼대고 있었다.(213-214p)
하지만 꼭 그렇게 약간의 수고가 필요한 일을 도모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 나에게 이런 저녁들이 무수히 생길 것이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보다 더 살아있다고 느끼는지, 나는 알았다.
그저 밖으로 나와서 반드시 걷자고 다짐한다.
특히 늦여름 밤이라면 걸어야 한다. 이날을 기억하기 위해 적어둔다.
(...)
어른이 되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안 건 섹스는 과대평가되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보다 우리는 벽면을 가득 채운 화가의 그림 앞에서, 격렬한 운동 후 샤워를 하면서, 가을에 은행잎이 보도를 카펫처럼 덮은 길을 걸으면서 온몸이 감각이 깨어나고 영혼이 정화되는 경험을 한다. 그대로 쓰고 싶지만 한국어로 황홀감, 도취감, 황홀경 등으로 번역해야 하는 ‘하이high’의 상태라고나 할까.(260-261p)
ㅡ 노지양, <오늘의 리듬> 中, 현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