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6

 

나는 딱 여기까지만.

 

 

 

다차원의 다중 우주는 실제로 관측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다중 우주론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중 우주론을 전제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까지 답하지 못한 우주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 다중 우주를 가정할 때 강력한 정합성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질문은 이 것이다.

“왜 우주는 다른 모습이 아니라 하필이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물리학자들에게 매우 난처한 질문이다. 그것은 우리 우주의 모습이 매우 임의적이기 때문이다.(77p)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창조론을 옹호하는 종교인들에게 미세 조정 문제는 환영할 만한 논쟁점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신이 우주에 개입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많은 이가 지금까지도 미세 조정 문제를 신 존재 증명에 활용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는 우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것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다행인 것은 다중 우주론이 과학을 구원할 구세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다중 우주론에 따르면 미세 조정은 신에 의한 조율도, 단순한 우연도 아니다. 이것은 우주가 무수히 많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필연이다. 다중 우주론은 저마다 물리량의 값이 다른 무한히 많은 우주가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가능한 우주가 있다. 그 수많은 우주는 저마다의 상수 값과, 저마다의 힘의 종류와 세기, 그에 따른 형태, 그에 따른 역사를 가진다. 이러한 다채로운 우주들은 무한한 시간 동안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우리 우주는 그저 수많은 가능성 중 다만 한 가지 형태를 가진 우주일 뿐이다. 지금과 같은 물리량을 가진 까닭에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과 생명이 탄생했고, 지능을 가진 존재가 태어나 자기 우주에 대해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을 인간 중심 원리라고 한다.

(...)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우주는 다른 모습이 아니라 하필이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을 함의한다. ‘왜 오직 우리 우주만이 존재하는가?’‘왜 극도의 우연적인 확률로 인류가 탄생했는가?’ 다중 우주론에 기반을 둔 인간 중심 원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신의 개입 혹은 우연으로 우리 우주와 인류의 탄생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 우주 외에 다른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대우주’를 고려할 때, 이 질문은 쉽게 해소된다.(80p)

 

이러한 결론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상식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는가? 인간 중심 원리와 다중 우주론의 결합은 인류에게 우주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정말 과학인가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영국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과 유사 과학을 나누는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반증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어떤 이론이 과학의 범위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론이 스스로 틀릴 가능성, 즉 반증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증가능성을 가진 이론이 여러 번의 검증을 거쳐서도 살아남았을 때, 그 이론은 좋은 과학 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증가능성은 과학과 유사 과학을 구분하는 좋은 기준처럼 보인다.

(...)

과학과 유사 과학의 차이는 그 이론이 많은 것을 맞히느냐가 아니라 반대로 그 이론이 틀릴 가능성을 갖느냐, 즉 반증될 가능성을 갖고 있느냐에 있다. 점성술과 사주가 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틀릴 가능성 자체가 없어서다.(82-83p)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자연이 종의 진화 방향을 선택했다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자연의 손을 빌려 신이 진화에 손을 댄다거나, 혹은 자연이 뛰어난 존재의 탄생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종을 발전시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공선택과 자연선택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목적의 유무다. 인간은 이익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생물의 번식에 개입하지만, 자연선택의 주체로서의 자연은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 자연은 그 자체로 펼쳐진 환경일 뿐이다. 진화는 목적 없이 이루어진다.(141p)

 

 

 

ㅡ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학> 中,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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